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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Jul 12. 2021

다이내믹 24hrs


1. 폭우와 별


금요일 저녁, 시골집을 향해 꽤나 먼 퇴근을 합니다. 꽉 막힌 시내 간선도로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길이 시원하게 뚫립니다. 신나게 달리다 보니 어느새 2/3 정도 왔습니다. 1시간 쯤 뒤면 도착하겠다고 룰루랄라 하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집니다. 내리는 정도가 아닙니다. 천둥번개를 앞세워 천지개벽하듯 들이붓습니다. 불어난 물로 자동차는 바퀴 구르는 것조차 버거워합니다. 앞이 안보이는 건 당연합니다. 비상등을 켜고 앞차 꽁무니만 바라보며 쩔쩔맵니다.


30여 분이나 지났을까? 엉거주춤 기어가다 보니 비가 성글어집니다. 보상심리까지 더해 쌩쌩 내지릅니다. 집에 도착해 불을 켜고 가방을 가지러 다시 밖에 나왔습니다. 차에서 내릴 때만 해도 자동차 유리에 빗방울이 떨어졌는데, 그 잠깐 사이에 날씨가 바뀌었습니다. 아, 별이 총총합니다. 복수초를 사이에 두고 눈과 봄기운이 한 판 힘겨루기를 하던 지난 3월 초 어느날 처럼, 장마철 날씨가 얄궂습니다.


2. 지하수


별난 장마철 별구경을 잠깐하고 집에 들어갑니다. 언제나처럼 수전을 틀어 물이 나오는지 확인합니다. 쫄쫄거리더니 더 이상 나오질 않습니다. 한동안 별 탈 없었는데 그예 속을 썩이기로 작정한 모양입니다. 우물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별이 떴다고는 하지만 깜깜한 밤, 그것도 조금 전까지 내린 비로 풀 섶이 담뿍 젖어 있을 텐데 낭패입니다. 혼자라 전등 비춰줄 사람도 없습니다.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마에 랜턴을 쓰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작대기 하나를 챙겨 들었습니다. 조심조심 우물로 갑니다. 철판으로 된 무거운 뚜껑을 열고 안에 들어갑니다. 누전차단기가 내려가 있습니다. 휴, 다행입니다. 이정도면 간단하게 처치할 수 있습니다. 차단기를 올리자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반갑게 들립니다. 또다시 자연인 놀이를 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쉽게 해결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큰 숨을 내쉽니다. 비웃는 건지 위로하는 건지 별 서너 개가 천연덕스럽게 반짝입니다.


3. 인터넷


우물을 정리하고 들어옵니다. 이번엔 인터넷이 먹통입니다. 모뎀을 주물러보지만 통신불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한밤중이라 어쩌지 못하고 날 밝은 뒤에 고장 신고를 합니다. 수리기사가 출발하겠다고 연락해옵니다. 주말에 산골까지 오시게 해서 미안했는데, 주말 출장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집니다. 밭에 있다가 굵어지는 빗줄기를 피해 처마 밑에 앉았는데 기사님이 도착합니다. 


모뎀을 살펴보시더니, 집 밖 통신선에 문제가 생겼다며 차에서 사다리와 케이블 같은 장비를 몽땅 챙깁니다. 퍼붓는 장대비를 다 맞으며 전봇대를 오르락내리락합니다. 통신선이 나뭇가지에 쓸려 잘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애쓴 끝에 인터넷이 살아났습니다. 조금 전 서비스 만족도 조사를 했는데, 통 크게 all ‘A’를 드렸습니다. 


4. 말벌통

매년 벌과의 에피소드가 생깁니다. 주로 벌에 쏘인 다음 벌집을 찾아 직접 지지고 볶는 이야기입니다, 이번엔 다릅니다. 통신사 수리기사님이 빗속에서 고생하는 동안 들마루에 앉아 비구경을 하는데 갑자기 ‘쌔’한 느낌이 듭니다. 고개를 들어 처마 밑을 살펴봅니다. 농구공만한 말벌집이 매달려 있습니다. 사실 말벌들은 도랑가 쪽 처마에 해마다 집을 지었습니다. 그래도 모른 채 지나쳤습니다. 자극하지 않으면 공격받을 일도 없다고 믿었고, 매년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가을이 되어 벌이 집을 비운 뒤에 긴 장대로 구멍을 뚫어 재활용을 막는 정도였습니다.


이번 벌집은 마당가 처마 밑에 자릴 잡았습니다. 비가 오는데도 들마루에 앉아 있는 머리 위에서 윙윙거리는데 등골이 오싹합니다. 어쩔 수 없이 119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질척거리는 빗길을 뚫고 작은 승용차를 타고 소방관 두 분이 오셨습니다. 방호복을 입고 후덜거리는 사다리에 올라 약을 뿌리고 어찌어찌 떨어뜨립니다. 밀납과 함께 떨어진 애벌레들이 더러는 곤죽이 되고 더러는 살아서 꼬물거립니다. 


집 나갔던 말벌이 돌아와 방황하며 웽웽거립니다. 딱 봐도 화난 기색이 역력합니다. 걸리면 죽음입니다. 한참동안 숨어서 엿보다 집 잃은 벌들이 모두 떠난 뒤에 잔해를 치웁니다. 미안하지만 미안해하지 않기로 합니다. 


5. 살모사


산 속이라 당연히 뱀이 있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다행히 집 주변에서는 구렁이만 눈에 띄었습니다. 보일러실이며 창고, 장작더미에서 1미터가 넘는 허물을 자주 봅니다. 보여도 그러려니 합니다. 집 지키는 영물이라 믿으며 오히려 고마웠습니다. 그래서인지 밭에 두더쥐는 많아도 생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살모사가 나타났습니다. 잠깐 해가 난 사이, 창고 앞 화단에서 몸을 말리다가 딱 걸렸습니다. 살모사는 위험합니다.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뱀 잡이용으로 만들어 둔 작대기로 머리를 눌렀습니다. 한참 동안 기운을 뺀 다음 축 늘어진 녀석을 도랑가로 던졌습니다. 머리와 목덜미에 묵직한 공격을 받은 뱀은 살아나기 힘들 거 같습니다.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무지하게 떨렸습니다. 이번에도 미안해하지 않기로 합니다. 


6.  먹구렁이


살모사와 전쟁을 치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먹구렁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현관 처마 밑에서 일광욕을 하다가 인기척이 나자 스멀스멀 기어갑니다. 1.5미터는 됨직합니다. 어쩌면 2미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까만색 바탕에 흰색 줄무니가 선명합니다. 


찾아보니 멸종위기종입니다. 작대기로 툭툭 쳐 장작더미로 들어가도록 유인합니다. 뒤돌아서는데 매력적인 색깔과 우아한 움직임, 당당한 자태가 눈에 어른거립니다. 동영상을 오랫동안 간직할 것 같습니다.


7. 다이내믹 24hrs


이상한 하루가 분명합니다. 몇 안되는 이웃들도 저마다 한 번씩 발걸음을 합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듣다 보면 30분에서 1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풀베기 울력 날짜를 알려주러 오신 마지막 어르신이 저녁 8시에야 어스름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갑니다. 서둘러 늦은 저녁밥을 먹고 10시쯤 자리에 누웠습니다. 전날 밤부터 꼬박 24시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하며 생각을 하려는데, 그냥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긴 하루였습니다. 


중도말촌中都末村)이 어느덧 5년차에 접어듭니다. 감당 안되는 풀은 못 본 채 눈감는 신공을 터득했고 농사는 주는 대로만 거둬들이는 냅둬농으로 진즉에 귀의했습니다. 산과 물과 바람과 안개와 풀과 나무와 벌레와 짐승들 모두에 익숙해졌고 동네 사람들과도 자연스러운 관계가 되었습니다. 웬만한 사건들은 다 겪어봐서 긴장할 일도 없습니다. 

그런 줄 알았는데, 나도 반은 산골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몇 가지 일이 한꺼번에 덤비니까 긴장이 배가 됩니다. 그만큼 몰입감이 높아집니다. 완전히 새로운 경험입니다. 일요일 저녁 도시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느 여인의 패러디가 머릿속을 맴돕니다.


“내가 이럴려고 대통령 했나?”


“내가 이럴려고 산골에 다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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