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학교 가는 길'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에 부쳐
성삼재 주차장에서 시작된 2키로 남짓한 길을 놀며 쉬며 걸어 드디어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했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왕성합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느라 땀 닦을 겨를이 없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산장은 안팎이 두루두루 궁금하고, 자연분해로 냄새를 날려버린다는 화장실은 그저 신기합니다. 제일 관심거리는 화장실 옆에 설치해둔 자전거 발전기입니다. 페달을 돌리면 전기가 만들어지는데, 휴대폰을 충전할 수 있게 장치해 뒀습니다. 형제는 두 대에 나란히 앉아 짧은 다리를 길게 늘어뜨려가며 열심으로 페달을 밟습니다. 단순한 놀이에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먼발치서 흐뭇하게 둘을 지켜보던 내 평화는 다운증후군 아이 몇 명이 나타나면서 깨졌습니다. 내 아이들보다 네댓 살쯤 많아 보이는 그들은 다짜고짜 바짝 달라붙더니 자전거를 만지기 시작합니다. 낯선 물건에 대한 경계나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조심성은 없었고 자신의 호기심에만 집중했습니다. 갑작스런 그들의 행동에 어린 내 아이들은 놀랐고 나는 겁이 났습니다. 만 6살이 되지 않은 작은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입니다. 서둘러 아이들을 끄집어내려 품에 안고 나자 떨리는 가슴이 겨우 진정됩니다. 자전거를 차지하고 페달을 밟는 그들은 내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해맑습니다.
대피소를 벗어나 노고단으로 오르는 돌계단에 접어듭니다. 힘들다는 작은아이를 앉고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가며 비로소 조금 전 상황을 돌아봅니다. 짧은 순간, 나는 왜 겁을 먹었을까? 그들이 내 아이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행동을 했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신나게 바퀴를 굴리는 그 아이들의 천진한 표정에 비춰볼 때 내 반응은 이해도 설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관계 맺는 방식이 다를 뿐 누구를 해코지할 생각도 없었고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 잠재의식에 내장된 편견만이 유일한 근거였습니다. “장애인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내 아이들과 그들의 우연한 접촉을 계기로 여과 없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선입견이 그들과 나 사이에 커다란 벽으로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노고단 정상에는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구례와 하동 너른 들과 꼬불꼬불한 섬진강의 여정을 한눈에 담아보려던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습니다. 대신 남쪽 하늘을 향해 선 채 한참 동안 속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했습니다. 이마에 맺힌 물방울이 안개인지 부끄러운 속내를 들킨 나머지 흘린 땀방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2009년 가을걷이 때의 일입니다. 남녘 들판에는 나락이 노랗게 물들고 있었습니다.
부끄러움은 잠시뿐, 그 날 일은 잊혔습니다. 그러다가 2017년 강서구 특수학교 논란 와중에 기억 저편에서 다시 튀어나왔습니다. 당시 이낙연 국무총리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부끄러움”이라고 말한 사진을 보며 나는 그날을 떠올렸습니다. 한참이 지났어도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특수학교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집값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집이 전 재산인데, 학교가 들어서고 나서 집값이 빠지면 어떻게 하냐고 하소연합니다. 왜 하필 우리 동네냐며 볼멘소리를 합니다. 언론과 SNS에서는 Nimby 현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아이들 교육은 나 몰라라 하고 집값 타령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나무랐습니다. 사회적 갈등, 이익 충돌의 전형으로 비치기도 했습니다.
나는 강서구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강서구 사람들에 대한 비난행렬에 섣불리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죄 없는 엄마들을 무릎 꿇게 한 게 바로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노고단에서 있었던 ‘사건’이 되살아난 이유입니다. 내가 노고단에서 아무 이유 없이 다운증후군 아이들을 경원시했던 것처럼 사회 전체가 배척을 일상화하고 증폭시킨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집값 타령하는 몇몇의 얕은 이기심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특수학교와 집값이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당시 언론과 교육청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큰 소동이 일어난 걸 보면 조사가 잘못됐거나 대중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모양입니다. 집값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라면 누구에 의해, 왜 떨어지는 걸까요?
집값은 특수학교 주변 사람들 때문에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그걸 원하거나 부추길 이유가 없습니다. 서울 사람 전체, 나아가 나라 사람 모두에 의해서입니다. 강서구의 몇몇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여전히 특수학교를 기피시설로 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유 없이 배척하고 소외시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회 전체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작당한 결과가 집값 하락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무릎 꿇은 엄마들 앞에 서 있던 목소리 큰 몇 사람의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집값이 떨어지는 현상 자체’가 우리의 현주소이고 수준입니다. 이낙연 총리가 말한 부끄러움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강서구 사람들에게만 욕을 퍼붓는 건 어쩐지 부당해 보였습니다. 내 집값이 떨어지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각자 마음속에 들어앉은 차별과 배제를 드러내고 반성하는 게 먼저입니다. 편견을 버리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특수학교 주변이라고 해서 집값이 달리 평가될 일도, 학교가 논쟁이 될 일도, 엄마들이 눈물 흘릴 일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다른 모든 사회적 차별과 함께 그들을 별도의 집단으로 틀거리 짓는 야만도 사라질 것 같습니다.
나에게는 그날 노고단에서 만났던 아이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일착입니다. 영문도 모른 채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몇몇 어린 친구들이 10년도 훨씬 지난 때늦은 사과를 받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에필로그]
1. 4년 전, 당시 강서구 특수학교 논란 중에 정리한 글입니다. 정리만 해 두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서진학교를 설립하는 쪽으로 마무리되어 서랍 속에 묻어 두었습니다. 이번에 영화 “학교 가는 길” 상영금지 가처분소송이 제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끄러운 기억을 다시 끄집어냈습니다.
2. 소송을 제기한 이유가 4년전에 그랬던 것처럼 영화가 집값을 떨어뜨릴 거라는 걱정때문인지 혹은 4년전 자신들의 부끄러운 행동이 영화를 통해 재조명되는 것이 창피해서 인지 알지 못합니다. 부디 후자였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