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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Sep 23. 2021

하늘 높고 물 깊은...

산박하

높은 산에서 부터 흘러내린 능선이 개울을 따라 이쪽 저쪽 양쪽에서 호위하듯 내달립니다.

능선 아래는 깍아지른 절벽이거나 깍아지른 돌밭이거나 깍아지른 흙산입니다.

워낙 험악해서 왠만해선 접근이 어렵습니다.

물 굽이 어디쯤, 조금 너른 땅이 생겨나면 그곳에 사람들이 터를 잡고 동네가 만들어집니다.

산골태생의 고향풍경입니다.


어린 시절의 가을에는 그래서 있는 기억과 없는 기억이 있습니다.

한아름씩이나 되도록 통을 키운 배추가 열병하는 비탈밭은 기억에 있어도 나락이 고개숙이는 너른 들은 기억에 없습니다.

돌맹이를 던저 돌배를 턴 기억은 있어도 긴 짱대로 붙타는 감을 딴 기억은 없습니다.

있는 기억은 있고 없는 기억은 없습니다.


산골 시절 가장 인상적인 한 장면이 있습니다.

매년 여름이면 어김없이 큰 물이 들이닥칩니다.

1년내내 쌓였던 너저분한 것들이 쓸려나간 도랑은 하루아침에 말간 새얼굴로 바뀝니다.

깨끗한데, 그래서 상쾌한데 왠지모르게 정이 가지 않습니다.

풀방집에 쥐 드나들듯 했어도 못본채 지나칩니다.

그렇게 한두달이 지나면 도랑에는 다시 물때가 끼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가을이 시작됩니다.


가을에는 물고기 잡기입니다.

그것도 족대나 어항 다 버리고 맨손 잡기가 제격입니다.

개울물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돌을 혀냅니다.

물살이 일거나 흙탕물이 생기면 꽝,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이번엔 콧바람조차 죽이고 신중에 신중을 더합니다.

돌을 혀낸 곳에는 뚜구리(동사리)가 엎드려 있습니다.

머리부분을 겨냥해 양손을 교차시킨 채 살짝 내리 누릅니다.

녀석의 예민한 감각에 발각되면 또다시 꽝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일촉즉발의 신경전을 벌이는 바로 그 순간, 뚜구리와 함께 하늘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의 놓고 푸른 하늘입니다.

하얀 구름의 배경노릇을  하느라 더 높고 푸르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아니, 물때 낀 돌맹이에 그림자로 어른거려서 더 높고 푸르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고백하건데, 고개를 들어 쳐다본 하늘보다 고개숙여 내려다 본 물속 하늘이 더 많았습니다.

뚜구리, 정감넘치는 물때, 천연덕스러운 돌맹이, 절체절명의 긴장감, 느리게 흐르며 장딴지를 간지럽히는 도랑물은 언제나 내 기억속 가을 하늘의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담고 있는 가을 물빛은 늘 깊었습니다.

가을 한 낮은 어째서 그토록 고즈넉해야 했는지 이유를 아직 알지 못합니다.


가을이라고 해도 더이상은 물고기 잡기를 하며 놀지는 않습니다.

대신 오늘 오후에는 산박하와 놀았습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부드러운 햇살을 눈과 귀에 담아 왔습니다.

반짝이는 물비늘과 흔들리는 산박하는 코끝에 데려왔습니다.

속눈썹을 간지럽히는 바람은 살갗에 난 솜털과 머리칼을 따라 왔습니다.


오늘 하루, 온전히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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