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 들이기
보일 듯 말 듯 늘 옅은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나눌 때면 편안한 낯빛으로 집중합니다. 안정된 시선 처리 속에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는 마주 앉은 사람 누구나 기분 좋게 만듭니다. 부드러운 얼굴을 보며 어린 시절을 짐작해보곤 합니다. 모든 자기소개서에 천편일률적으로 들어가는 말, ‘자상한 아버지와 인자한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면 저런 모습이겠구나 생각됩니다. 정서적으로 풍요롭고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는, 억압과 폭력과 소외로부터 자유로운 유년 시절을 상상합니다.
오래전 여름, 친구 소개로 만난 A 이야기입니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안사귀는 것도 아닌 애매한 관계는 가을 내내 이어지다가 겨울이 되기 직전 끝났습니다. 열등감과 자격지심에 찌들어 있던 내가 A를 공격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가을동화는 겨울연가로 이어지지 못했고 남사친 여사친 관계마저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둘 사이는 파탄 났습니다.
A를 둘러싼 모든 것, A에 속한 모든 것에는 일체의 모난 것이 없었습니다. 솜씨 좋은 장인이 공들여 만든 가구 같았습니다. 세심하게 라운드 처리된 모서리는 누구든 다치게 할 일이 없었습니다. 유려한 곡선과 두루뭉술한 둔각이 A가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눈빛이 그랬고 말투가 그랬습니다.
하물며 걸음걸이마저 그랬습니다. 무릎을 완전히 펴지 않고 걸었는데 가벼운 발걸음에 얹힌 몸이 사뿐사뿐 춤을 추는 것 같았습니다. 가냘픈 어깨가 리듬을 타고 규칙적으로 오르내렸습니다. 나란히 걷다 보면 덩달아 발걸음이 가뿐해지고 유쾌해졌습니다. 설악산을 좋아했는데, 그런 걸음이면 대청봉 정상까지도 힘들이지 않고 다닐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양희은의 노래 ‘한계령’을 처음 알게 된 것도 A를 통해서였습니다. ‘저 산은 내게 오지마라, 오지마라 하네 ~~’
잊고 있던 A를 다시 떠 올린 건 생활방식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면서부터입니다. 어느 날 양치를 마친 뒤였습니다. 무심코 칫솔을 툭 던지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텐데 그날따라 괘씸하게 느껴졌습니다. ‘잘 쓴 칫솔을 왜 냅다 던져버려. 더러운 이빨을 깨끗하게 닦아 줬는데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돼? 고마운 마음으로 고이 내려둬야 되는 거 아니야?’
그날 이후로 주변을 요모조모 살펴보았습니다. 치약과 칫솔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온갖 것을 대하는 내 태도는 거칠고 투박했습니다. 현관문을 여닫을 때, 계단을 오르내릴 때, 비누를 내려놓을 때, 샤워기를 걸 때, 수저를 사용할 때, 탁자에 컵을 내려놓을 때, 가방의 지퍼를 열고 닫을 때, 변기 뚜껑을 덮을 때, 리모컨을 만질 때, 사탕을 내려 놓을 때마다 ‘틱 틱’ 소리가 났습니다. 무성의한 손끝에서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버려지듯 던져진 물건은 때로 깨지고 때로 부서집니다. 부주의한 행동은 내게도 상처를 남깁니다. 돌부리를 걷어차고 책상에 무릎을 찢습니다. 수도꼭지에 부딪혀 손등에 멍이 들고, 종이에 베인 손가락에서는 피가 납니다. 화목난로에 쓸 장작을 준비하던 어느 날은 양쪽 팔뚝에 피멍이 들었습니다. 통나무를 함부로 다루다가 짓눌려 생긴 상처입니다. 잘못 들인 습관 탓에 수난이 계속됩니다.
고약한 태도는 상대가 사람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이별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살면서 많은 사람과 조직을 만나고 헤어졌습니다. 친구를 떠났고 선후배와 멀어졌습니다. 회사를 옮기고 동호회를 그만두었습니다. 물론 어떤 이별은 슬픔과 아픔이 컸습니다. 충격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내가 떠나온 사람과 사람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의 나를 규정짓는 여러 모습 가운데 어둡고 의기소침한 면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이별에서 비롯된 죄의식과 자기부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주홍글씨로 남겨진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이별 후에 나는 아무런 동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던 겁니다. 다른 절을 찾아 길을 나서는 스님처럼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미련이 없으니 뒤돌아볼 일도 없습니다. 그런 이별에서 내가 떠나온 건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한 숱한 시간과 사건들도 잊혀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쌓아 온 업장이 인(因)이 되어 인간관계의 깊이는 얕고 범위는 좁아지고 말았습니다. 한마디로 빈약합니다.
따뜻한 곡선과 여유 있는 둔각으로 표현되는 A에 비해 나는 차가운 직선과 날카로운 예각으로 살았습니다. 사무적인 말투에 눈빛은 건조합니다. 땀내 묻어나는 질박한 관계를 꺼리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데는 여전히 서툽니다. 자아의 틀을 깨지 못해 안으로만 향해 있는 시선은 타인에게 건넬 여유 있는 눈길이 없습니다. 뾰족한 성격은 주머니 속 송곳 마냥 아무 때나 삐져나옵니다.
A와 내가 대조를 이루는 것처럼 습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손가락 지문이 각자에게 고유하듯 다른 사람과 나를 구별하게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게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러 저러한 습관이 모여 성격이 되고 이 둘은 나를 나이게끔 하는 그 무엇이 됩니다.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내 습관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붙임성 없고 시니컬한 성격으로 나타납니다.
일종의 자동화 프로그램인 습관은 효율성 측면에서 유리합니다. 사소한 선택을 위해 골머리를 쥐어짜는 것보다는 습관 혹은 습관적인 행동에 맡겨 두면 에너지를 아낄 수 있습니다. 습관 덕분에 우리는 외부의 자극에 순간적으로 반응할 수 있고 별다른 고민 없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적인 반응과 선택을 이어가면 바로 일상생활과 삶, 즉 ‘나’ 자신이 됩니다.
습관은 한번 프로그래밍 되어 인스톨 되면 삭제나 업그레이드가 쉽지 않습니다. 자동출력과 래칫효과는 효율성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잘못 탑재될 경우 원치 않는 길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거나 ‘사람은 고쳐 쓰지 못한다’는 건 모두 잘못된 습관을 어쩌지 못해 하는 말입니다.
뇌과학에 따르면 습관은 주로 기저핵(basal ganglia)에서 담당합니다. 잠재의식 저장 탱크에 해당하는 기저핵은 머릿속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위치만 봐도 접근이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새 습관을 들이자면 그만큼 힘이 듭니다. 훈련을 거듭해야 합니다.
습관은 신경경로를 통해 작동합니다. 어떤 행동을 의식적으로 반복하면 뇌에는 예전에 없던 신경경로가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왕에 있던 신경경로로 돌아가려 할 게 뻔합니다. 집요한 저항을 꾹꾹 눌러가며 새 행동 방식을 늘려가다 보면 새로 만들어진 좁은 신작로는 언젠가 탄탄하고 넓은 길로 바뀝니다. 종국에는 포장도로, 그러니까 습관이라는 새로운 자동출력 프로그램이 완성됩니다. 습관 만들기는 신경경로라는 새길을 닦고 확장하는, 그래서 나를 길들이는 과정입니다.
주변을 다시 돌아봅니다. 물건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먹고 입는 데서부터 시작해 잠자고 움직이려면 꼭 필요한 물건들입니다. 살살 다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만지거나 내려놓을 때 무심결에라도 툭 툭 내던지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손끝에서 비롯되는 소리를 줄여보기로 합니다.
프로토타입을 몇 개 정했습니다. 우선 문 닫는 연습입니다.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손에 힘을 빼지 않고 끝까지 밀어서 닫습니다. 다음으로는 물건 내려놓기입니다. 열쇠, 볼펜, 사탕, 베개를 비롯해 무엇이건 던지지 않기로 합니다. ‘툭 툭’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나면 다시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발걸음입니다. A가 그랬던 것처럼 춤추듯 걷는 건 못해도 가볍게 걸어보려 합니다. 발소리를 낮추고 살금살금 걷다 보면 걷고 싶은 날이 더 많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버릇은 버릇입니다. 며칠 해 봤는데 잘 안됩니다. 물건들은 여전히 던져지고 문 닫히는 소리는 계속됩니다. 잘 닦여진 신경경로가 버티고 있는데 새 신경경로는 이제 구상단계에 불과합니다. 고속도로를 버리고 오솔길로 가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상했던 저항입니다. 오래된 습성인 만큼 차근차근 바꿔야겠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이어 간다면 작은 오솔길은 신작로를 거쳐 포장도로가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국도나 고속도로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포장도로에만 이르러도 많이 바뀌어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 지난한 과정을 통해 까끌까끌한 성격이 몽글몽글하게 연마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