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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글그림 Aug 06. 2023

196. 그리기 힘든 날



























그릴 만한 이야기가 한 세 가지 정도 떠올랐는데 막상 저녁을 먹고 앉으니 그 세 가지가 모두 다 그리기 싫어져버려 세상 험난하게 작업했던 회차였다.


종종 있는 일이다.

과거의 내가 그리고 싶었던 것에 현재의 내가 퇴짜를 놓는 일이.


그 둘은 분명히 동등한 관계인데 이럴 때면 꼭 현재에 살고 있는 ‘오늘의 나’가 막강한 권력을 가진 클라이언트라도 되는 양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당연히 기계가 아닌 사람인지라 그림이 잘 그려지는 날도 있고 안 그려지는 날도 있는데 굳이 잘 못 그리는 날이면 ‘과거의 나’를 불러와 이유를 묻고 야단을 친다.


모든 것에 원인은 항상 단독일 수 없고 이 경우는 오히려 과거의 나보다 오늘의 나 때문일 확률이 더 높은데도 말이다.

-기분이 안 좋거나 건강이 안 좋거나 그리려고 했던 이야기 속에 상황들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더 좋은 이야기를 그릴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거나. 그런 건 없지만 그래도 이 이야기는 너무 재미없어라는 판단이 섰다거나, 인체 투시를 맞추고 싶었는데 팔다리가 길이가 맞지 않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거나! (그냥 다시 그리면 되는데!)


현실의 불만족이 과거에 대한 단죄로 이어졌다가

그렇게 야단만 맞기엔 또 너무나 열심히 고군분투했던 날들도 많은 것 같고,

사실은 핑계가 아니라 정말로 이 사람 잡는 더위 때문인 것도 같고,


그리고 항상 ‘오늘의 나’이기만 했던 ‘과거의 나’였다는 것이 떠올라 급 미안해져 빠르게 사과했다.


사과는 빠를수록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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