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글그림 Jan 17. 2023

224. 즐거움 되찾기





































글을 제대로 써보고 싶다고 생각이 든 것은 작년부터였다.

책을 만들고 싶었다.

쌓인 그림들이 나를 밀어대기 시작했다.

소재도 내용도 들쭉날쭉한 이 그림들을 책으로 엮을 수 있는 방법은 글뿐이다!

하는 이상한 해결책이 떠올랐다.


왜 이게 이상하냐면 내가 글을 정말 못 쓰기 때문이다.

지금도 한 문장을 썼다 지웠다를 수십 번 반복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주 상투적인 업무상의 회신 메일을 보내는 것조차 일이십 분은 기본이고

그림 한 장을 30분 만에 그려놓고 그 그림에 달 단 몇 줄의 코멘트를 쓰는데 30분이 넘게 걸린 적도 허다하다.


그러니 '글'이라고 찾아낸 그 해답이 스스로가 보기에 너무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인기 없는 만화를 책으로 내려면 그림을 좀 더 잘 그리던가

  팔릴만한 소재를 생각해서 그릴 생각을 하는 게 맞는 수순일  같은데 뜬금없이 글이라니.


나는 지금의 스타일도 그리는 내용도 바꾸고 싶지 않고 거기다

세상에서 가장 못하는   하나인 글쓰기까지 덧붙여보겠다니 기가  노릇이지만

나는 아직도 꿈과 희망이 가득 찬 저쪽 편의 자아를 존중한다.

어떻게든 현실에 발을 붙이고 그 이상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쪽 편의 자아는 골치가 아플지언정.


떠올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번 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그림만 있던 내 작업 시간에 글을 끼워 넣고 2022년을 보냈다.

누군가는 석 달이면 책 한 권은 쓸 수 있다기에 나는 이미 그 책의 반이 그려진 그림이고 

그렇다면 책 반 권 쓰기 즘은 아무리 못해도 6개월이면 가능할 줄 알았다.


갑자기 분위기 파악 못하는 옛날식 개그가 떠오른다.

그것은 만만의 콩떡 경기도 오산이었습니다(....)


골방에서 글쓰기는 아무리 해도 나아지질 않았다.

글감을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연습장은 두 권을 넘겨도 건질만한 것은 사막에 오아시스 수준이었고,

워드로 옮겨 간 작업은 온통 마음에 안 드는 단어들을 지웠다가 다시 쓰고 있는 커서의 깜박임과 백스페이스의 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꺼버리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그 험난한 과정을 거쳐 꾸역꾸역 쓴 것이 15페이지 정도 되었는데 

해를 넘긴 어느 날 문득 그 글들이 다 잿빛으로 보였다. 

아. 이 글은 죽은 글이구나. 내가 시체를 멱살 잡고 꾸역꾸역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끌고 가고 있었구나.

이렇게 해서는 10년을 걸려 책 한 권을 쓴 들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이대로는 안 돼, 어떻게든 살아있는 글을 써야 돼.


새해와 함께 찾아온 그 생각에 사로잡혀 며칠은 미로에 갇힌 쥐처럼 빙글빙글 돌다가 나온 곳이

바로 이 공간이다.


일단 환하고 넓은 것이 마음에 든다. 


여전히 엉망진창으로 쓰고 있지만 그래도 하얀 것은 모니터요 까만 것은 글자인 가운데

내 워드 파일 속 글들보다는 조금은 선명해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기분 탓이면 또 어떠랴.

내가 그리는 그림도 글도 다 기분 좋자고 하는 일인데.


글과 나와의 관계가 처음부터 안 좋았던 것은 아니었으니

분명히 다시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곳이 그런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좋은 기분이 든다.


소원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조금은 천천히 그리고 조금 더 공들여 다가가 보고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