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이전의 이야기

"우리 딸은 야간 자율학습을 안 했으면 합니다"

by Honey

어린 시절 장래희망을 물으면 나의 꿈은 언제나 '선생님'이었다.

어쭙잖게 멜로디를 조금씩 두들기며, 남들은 다 관심도 없을 '음악'교과에 혼자 집착하기 시작한 중학생 시절부터는 그 꿈도 더 구체적인 '음악 선생님'으로 바뀌기도 했었다.

중학교가 한 학년에 150명쯤 되는 작은 학교긴 했지만(1990년대 중반 당시엔 한 학급에 학생수가 50명 남짓이었다) 그중에 그래도 성적은 꽤 상위권이었고, 공부도 마지못해서가 아닌 재미로 하던 그런 때였다. 마치 내 장래희망은 아무런 무리 없이, 당연히 이루어지겠다고 여기던 그런 시절.


고등학교에 진학할 즈음엔 정해진 순리처럼 인문계고 고입선발고사 시험을 봤고, 나는 별일 없이 원하던 고등학교에 합격을 했다. 당시 진학할 고등학교에선 하얀 대자보에 1등부터 마지막 등수까지의 석차를 수기로 써서 학교 벽면에 게시하는 방법으로 합격자 발표를 하기도 했었다. 물론 거기엔 불합격자와 예비순위자들의 이름도 있었다. 무슨 대학들처럼. 지금 그런다고 하면 전교생에게 고소를 당하고도 남을 방식이다.


1996년 3월,

나는 고등학교에 준수한 성적으로 입학을 했고, 당연히 입학 첫날부터 밤 11시까지 누구나 해야 하는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됐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처음으로 400점 만점의 수능이 시작됐으며(1997학년도 수능), 수능 자체가 도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라 내신도 물론 중요했지만, 수능점수 자체가 대학의 거의 모든 길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때였다.

모름지기 공부란, 손을 놓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저절로 잘되는 것이 아닌, 정말 꾸준히 해야 그 결과가 거짓 없이 나오는 것이기에, 모두들 인문계고 진학의 목적(높은 수능 점수로 흔히들 말하는 좋은 대학에 가기)을 잊지 않기 위해 열심히 야간 자율학습을 시작했다.


당시 시내에 있던 고등학교엔 인근 '면'단위 지역의 통학생들이 많았고(길게는 버스로 1시간 이상의 거리들도 적잖았다), 대부분의 그 시골들은 밤 9시가 되면 막차가 끊기는 그런 곳들이었다. 그래서 강구해낸 방법이 각 마을마다 전세버스처럼 인원에 맞춘 차량을 빌려 함께 하교를 하는 거였다. 그렇게 집에 가면 시간은 거의 자정이 가까웠고, 기절하듯 잠들다 새벽이 되면 다시 학교로 향하는 전형적인 입시 고등학생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던 그때,

야간 자율학습을 하루하고 집에 갔던 다음날, 아빠가 갑자기 학교로 찾아오셨다. 눈치챌 틈도 없이.

그리고는 담임이 교무실로 나를 불렀다.

"허니는 오늘부터 야자 안 해도 된다"

"...... 네?.."


사연인즉, 아빠가 학교에 찾아오셔서 담임과의 면담을 요청하시자마자 하신 말씀이,

"우리 딸은 야간 자율학습을 안 했으면 합니다. 학생들이 다니기엔 위험할 수 있는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강제적으로 학교에서 붙잡아 두지 않으셔도 지금의 성적 유지하면서 책임감 있게 집에서도 공부할 수 있는 아입니다. 혹시라도 자습을 안 한 이유로 성적이 떨어진다면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하셨다는 우리 김아빠..

(큰딸을 너무 많이 믿으신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입학식 다음날부터 친구들이 다 남아있는 학교에서 혼자 수업만 마치고 하교를 했다.

그리고 물론 집에서 공부도 했다. 다행인지 매달 보던 모의고사에선 그다음 달에도 석차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이렇게 꾸준히 내가 해오던 대로만 하면 내 꿈을 향해 나아가는데 더 이상의 변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갑작스러운 상황을 핑계 삼아 나 자신을 너무 많이 놔버린 탓에, 소중한 꿈조차 어느 순간 스스로 버린 꼴이 됐지만 후회는 없다. 지금의 나도 내가 결정한 나니까. 다만 2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앙금처럼 남아있는 당시의 일이 한 가지 있다.


아빠의 장례를 치르고 등교한 다음날, 일명 '탄감자'라고 불리던 나의 담임은 위로나 안부 따위 대신 아주 무표정한 자세와 말투로 나에게 이런 말을 처음으로 건넸다.

"내일부터 야자 해야지"

미친놈.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생애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 나이가 많다고 다 어른은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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