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했던 봄이 지나고 괴로웠던 여름이 시작될 무렵,
매년 한 번은 꼭 가기로 했던 해외 원정의 꿈을 올핸 정말 이룰 수 없는 건가 싶어 낙심하고 있을 때,
우리 팀은 ACL(아시아챔피언스리그) 조별 경기를 무사히 치르고, 16강에서 험난했던 중국 베이징과의 원정 경기까지 승리로 장식하면서 고맙게도 8강에 무사히 진출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가야지, 올해도 나의 해외 원정을!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니까.
혹시나 토너먼트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그냥 접을 수밖에 없었을 해외 원정 계획이었지만, 여기까지 이렇게 또 살아남아주니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제 비행기를 타던 즈음엔 진절머리 나던 일상이 정리되고 시간적 여유까지 생길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8강전에서 우린 일본 J리그의 '감바 오사카'라는 팀을 만나게 됐다.
또.. 일본이지만...? 이번에도 역시 다른 도시니까,
더욱이 오사카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일본의 대표적인 도시라고 익히 소문을 들었던 터라 다시 또 기대감만 커지고 있었다. 뜻이 맞는 서너 명으로 시작된 원정 계획이 나중엔 열 명 남짓의 인원으로 늘어나는 변수가 생기긴 했어도 일정을 준비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진행까지도 순조로울 줄 알았는데..)
이미 여름이 한창이던 때였다.
토너먼트는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치러진다.
이기는 팀의 승점이 높은 건 당연한 일이고, 혹시 비기더라도 원정을 가서 득점을 하는 팀이 우위를 점하는 '원정 다득점' 우선 원칙이 ACL엔 적용된다.
2015년 8월 26일 수요일,
8강 1차전은 홈에서 치러졌다.
뭔가 터질 듯, 터질 듯, 좋은 경기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득점은 나오지 않았고, 서로가 0:0이라는 스코어를 받아 든 채 2차전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남은 2차전이 원정 경기였으니 혹시라도 득점을 하고 비기는 상황이 되면 무조건 우리 팀이 준결승에 진출하게 되기 때문에 확률적으로 불리한 싸움은 아니었다.
2015년 9월 16일 수요일,
8강 2차전 원정 경기가 치러지는 날,
나는 들뜬 마음으로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사카는 처음이니까.
일행들과 함께 난바역 근처 숙소에 짐을 풀고는 한껏 기대감을 안은 채 경기장으로 향했다.
감바 오사카의 홈 경기장은 오사카 중심부인 난바역에서도 전철을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부지런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도착한 경기장엔 생각보다 많은 전북의 원정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일본이 아무리 가깝다고는 하나 300여 명에 가까운 원정 인원이 이렇게 먼 남의 나라 경기장에 함께 모인 것만 봐도 오늘 경기에 대한 기대감을 알 수가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드디어 킥오프,
경기는 시작이 좋았다.
이른 시간 페널티킥을 얻으면서 레오나르도가 보기 좋게 득점을 성공시키자 원정석의 분위기도 한층 더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기를 금세 감바 오사카의 동점골이 터졌고, 1:1의 스코어로 전반전은 마무리가 됐다.
토너먼트는 이 경기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기에 후반전엔 더 팽팽한 경기가 이어지고 있었고,
그러다 종료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후반 76분, 감바 오사카에게 역전골을 먹히고 말았다..
'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쉬운 마음과 초조한 생각까지도 들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껏 열심히 싸워준 선수들을 향해 원정팬들은 더 큰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주고 있었다.
그러기를 시간은 점점 더 지나 90분의 정규시간도 1분여밖에 남지 않은, 정말 아쉽지만 지금까지도 잘 싸웠다 하는 찰나, 당시 외국인 선수였던 니콜라스 케이지를 닮은 '우르코베라'가 정말 기적 같은 동점골을 넣어 버렸다.
와!!!!!!!!!!!!!!!! 원정석의 분위기는 정말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적이었다.
원정 다득점의 원칙에 따라 이대로 끝나기만 해도 준결승에 진출하는 건 우리 팀이니까,
정규시간이 지나고 추가시간이 주어지자 경기를 승리했을 때 부르는 응원가인 '오늘의 승리자 전북'을 부르기 시작했고, 원정석은 이미 감동의 도가니였다. (누가 좀 너무 이르다고 말리지 그랬니..)
그렇게 주어진 추가시간도 정말 다 끝나갈 무렵,
이상했다.. 상대팀은 마지막까지 공격을 늦추지 않고 올라가는데 우리 선수들은 대다수가 여전히 하프라인 근처에서 감바 오사카 선수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 어? 하는 순간 터진 감바 오사카의 쐐기골..
수백 명 원정팬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고, 홈팬들의 환호는 더 크게 경기장을 채우고 있었다.
다리엔 힘이 풀렸고 맨 정신으로 서있기 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을 보자고 새벽부터 비행기를 타고 남의 나라까지 온 건 아닐 텐데..
아님 그냥 차리리 2:1로 지고 끝났으면 지금보다 조금은 나았으려나..
멀리까지 응원을 온 팬들도 이렇게 상실감이 큰데,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온 힘을 다해 뛴 선수들은 얼마나 더 힘들까.. 머릿속이 너무나 괴롭고 복잡했다.
숙소가 있는 난바역까지 한 시간 반을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넋이 나간 상태였다.
경기장 근처에서 원정팬들을 향해 깐죽거렸다는 감바 오사카 팬들에게 짧고 굵은 한마디를 날렸다는 얘기를, 다음날 정신을 차리고 들었을 때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때의 상실감은 지금 생각해도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질 정도다.
그 가을의 일을 겪기 전까지 가장 마음이 힘든 경기로 꽤 오랜 시간 기억되기도 했으니까,
진짜! 세상에 비겨도 되는 경기는 없어.
그리고 끝날 때 까진 정말 끝난 게 아닌데 이걸 또 겪으면서 깨닫는다, 우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