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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y Jan 13. 2023

이렇게나 귀한 거였어,

어디서든 최고의 자리는 올라가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

지난 시즌, 압도적인 모습으로 조기 우승을 확정 지을 때만 해도 모두가 다음 시즌에 대한 희망적인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도 큰 변화가 생겼고, 그 변화 속에서 이전과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기란 매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올시즌 우승을 목표로 전력을 보강한 울산현대와 시즌초부터 1위 자리를 놓고 올라서다, 내려서다를 반복하며 우승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도 시즌 초중반엔 꽤 오랜 시간 1위의 자리를 지켜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던 우승 경쟁은 시즌 말미로 가면서 우리의 뒷심이 더 부족해지고 있었다.

정규라운드 막판쯤 다시 1위의 자리에 올라서는가 싶더니 태풍과 함께 우리의 기운도 빠져나간 것인지...

울산과 동일한 승점으로 2위 자리에 내려서면서 치른 순연 경기에서 우리는 무승부, 울산은 승리를 거두면서 이젠 승점까지 차이가 난 2위의 자리에서 파이널 라운드를 맞이하게 됐다.

다행히 정규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울산이 패하는 동안 우리는 무승부를 거두면서 승점 1점을 챙기긴 했지만, 이어진 파이널 라운드에서 울산이 3연승을 질주하는 동안에도 무승부까지 한 번 기록하면서 승점 차이는 한 경기 차이로 더 벌어졌고, 이제는 모두가 전북의 대항마로 울산의 시대가 시작되는구나 하면서 리그 막판의 우승 분위기도 울산으로 굳어져 가는 듯했다. 

그리고 이제 리그는 단 두 경기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운명처럼 마지막 라운드를 앞둔 37라운드에 두 팀이 만나게 됐다.




2019년 11월 23일 토요일,


운명 같은 한 판이 펼쳐질 울산 원정 경기날이다.

나는 사실 이날 원정에 함께 하질 못했다. 아니, 축구 보러 가면 큰일 나는 날이었다.

내 인생의 베프인 여동생의 결혼식날인데.. 세상 어떤 정신 빠진 언니가 동생 결혼식날 축구를 보러 가겠냐고요... 대신 모든 연락과 SNS를 차단하고 결혼식에 집중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완벽한 정산과 신혼여행 배웅까지 마친 뒤 집으로 왔고, 도착 후 TV를 틀었더니 무슨 운명처럼 그 시간에 딱 맞춰 경기의 재방송을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귀 막고, 눈 막으며 결과에 대한 모든 스포일러를 차단한 상태였다)

나는 마치 지금 킥오프를 한 경기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TV 앞에 앉았다. 울산은 오늘의 경기를 이기면 무조건 우승이다. 사실은 비겨도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거였고(승점 3점 차 유지), 우리는 만약의 가능성을 위해서라도 오늘의 경기를 꼭 이겨야만 했다. 그래야 울산과 승점이 같아지는 상황에서 마지막 라운드에 희망을 가질 수가 있으니..

전반은 양 팀 모두 득점 없이 끝이 났다. 그리고 이어진 후반 초반, 페널티 박스 아크 왼쪽에서 김진수 선수가 때린 멋진 발리슛이 그대로 골로 연결되면서 팀이 1:0으로 앞서기 시작했다. 원정팬들은 엄청나게 환호하고 있었고, 김진수는 그런 원정팬들을 지휘하는 세리머니를 펼치며 분위기를 한껏 더 끌어올리고 있었다.

잘한다, 우리 진수,


하지만 경기는 아쉽게도 20여분 뒤, 울산의 수비수 불투이스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면서 1:1 무승부로 끝이 났다. 내 생각엔 이게 더 최악이었다. 정말 이도저도 아닌.. 승점 3점 차는 그대로 유지된 채 마지막 라운드만을 남겨 두고 있었고, 사실상 이 판을 뒤집기란 이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2019년 12월 1일 일요일,


드디어 이번 시즌의 마지막 홈경기이자 우리의 실낱같은 희망이 결과로 보일 수 있는 날이다.

울산은 승점 79점에 70득점, 우린 승점 76점에 71득점으로 최종라운드를 앞두고 있었다.

(K리그의 순위는 승점 -> 다득점 -> 득실차 순이다)

사실상 모든 경우의 수가 울산의 우승을 점치고 있었다. 단 하나의 수만 빼고.

그 단 하나의 수는 우리가 무조건 강원을 이기고, 포항이 울산을 잡아줘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강원을 100:0으로 이긴다고 가정해도 울산은 오늘의 경기를 비기기만 해도 우승인 것이다.

아니, 혹시라도 우리가 강원을 이겼는데 울산이 그보다 더 많은 골을 넣고 져도 울산이 우승이다.

사실상 우리의 우승은 정말 우리들만 바라는 기적 같은 일인 것이다..

프로축구연맹의 총재와 주요 관계자, 그리고 '찐' 트로피까지 모두 울산으로 향했다.

14년 만에 우승을 바라는 그들의 바람도 우리만큼 간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의 이러한 간절한 염원 속에 드디어 최종라운드의 킥오프 휘슬이 동시에 울렸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니 가장 중요한 메시지였던 '영일만 형제여 힘을 내라'


응원석에 모인 팬들은 팀의 승리와 기적 같은 우승을 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마지막 경기를 함께 했다.

궂은 날씨 속에서도 팬들은 응원을 멈추지 않았고,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 뛰고 있었다.

그러던 전반 39분, 이승기 선수가 올려준 프리킥을 문전에 있던 손준호 선수가 절묘하게 헤딩으로 골문을 향해 방향을 틀어준 볼이 크로스바를 맞고 골대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렇게 귀한 팀의 선제골이 만들어졌다.

손준호 선수의 이 한 골이 정말 얼마나 소중했는지..


선수단과 팬들은 모두 열광적으로 환호했고, 그렇게 전반전까지 마무리가 됐을 때, 타구장에서는 1:1의 스코어를 전해 왔다. 우리가 이기고 있는 건 기뻐할 일이었지만 사실상 울산은 지금처럼 비긴 채로 경기가 끝나도 우승이 확정이니 마음이 급한 건 우리였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후반전, 타구장의 소식보다 우리의 승점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한 일이다.

강원은 한 점 차를 따라잡기 위해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고, 우린 팀의 승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중 기적 같은 첫 번째 소식이 들려왔다. 후반 10분, 일류첸코의 골로 포항이 다시 앞서나가기 시작한 것.

타구장의 소식에 응원석엔 환호가 일었고, 모두의 간절함은 더 커져만 갔다. 우리의 선수들이 지금의 승점을 그대로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과 포항이 조금만 더 힘을 내줬으면 하는 마음까지 더해져서..


우리 선수들은 정말 사력을 다해 뛰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서 추웠던 날씨 탓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감과 떨림은 감출 방법이 없었다. 아슬아슬한 강원의 위협적인 공격이 여러 번 계속 됐고, 그러던 중 응원석에서 다시 한번 환호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울산 김승규 골키퍼의 실책을 기회로 살린 포항의 허용준 선수가 팀의 세 번째 골을 만들어 낸 것,

1:2의 상황에서 한 골만 더 넣고 비기기만 해도 우승이었을 울산이 경기시간 막판 추가 실점까지 하게 된 것이다. (비겨도 되는 경기가 세상에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전주성(전주월드컵경기장)의 환호는 점점 더 커졌고, 급기야 전광판을 통해 타구장의 소식을 알리며 선수들의 사기까지 더 북돋아 주고 있었다. 추가시간까지 계속된 강원의 공격에는 정말 이게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떨림과 긴장이 그대로 터져 나왔고, 그렇게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모두가 정말 얼마나 감격에 겨워했는지 모를 정도다.


하지만 아직 타구장의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 실제 남은 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불과 몇 달 전, 강원에게 추가시간에만 3골을 허용하면서 역전패를 당한 포항의 기록이 있었다. 물론 그런 일이 또 있으면 절대 안 되겠지만..

전주성의 모든 눈은 타구장의 경기로 향했고, 그렇게 타구장도 추가시간만을 남겨둔 상황, 그런데 세상에나..

오히려 울산이 페널티킥을 내주면서 추가 실점을 하게 됐고, 1:4의 스코어로 경기는 끝이 났다.


울산의 경기 종료를 확인하며 우리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동국이형의 이런 감격적인 표정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세상에나......

단 한 가지 경우의 수였던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전북은 결국 최종라운드에서 다시 1위의 자리를 되찾았고, 2위 울산과 동일 승점, 다득점 한 골의 차이로 우승을 확정 짓게 다. 거기다 리그 3연패다.

여러 번의 우승을 보았지만 이보다 감격적인 우승이 또 있을까...

선수단과 팬들 모두 벅찬 눈물을 감출 길이 없었고, 그렇게 만약의 상황을 위해 준비한 '가짜' 트로피와 함께 우승 시상식을 진행했다. (진짜면 어떻고 가짜면 어때, 이렇게나 뭉클하고 멋진 전북인데 ㅠ.ㅠ)


2019년 K리그 우승 시상식 [사진출처(좌)-신동아 '서호정 축구칼럼니스트' 기사 사진]


K리그 팬들 사이에는 우스갯소리로 '어우전'이라는 말이 있다.

'어차피 우승은 전북'을 줄여 부르는 말인데, 어쩌면 이번 시즌에 가장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언젠가는 이런 우스갯소리도 추억으로만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올 테지만..


근데, 이런 극적인 우승도 좋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좀 더 전북답게 축구하고 우승하는 건 어떻습니까?!







<2023년의 K리그 일정이 오늘 발표됐다. (예상처럼) 공식 개막전은 2월 25일 울산문수축구경기장에서 울산현대vs전북현대의 '현대가 더비'로 정해졌다. 그렇다면 지난 시즌 FA컵 우승을 한 우리는 그 시퍼런 경기장에서 리그 우승팀에게 도열 박수를 쳐주게 될 텐데.. 코로나 이슈를 핑계로 우리가 더블을 달성했던 다음 시즌에선 개막전 상대가 바뀌었으면서, 다시 모든 게 정상이 된 지금은 그걸 꼭 해야만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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