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사과를 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하나요? 내가 잘못을 할 수 있고, 실제로 지금 한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고, 남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기에 다칠 수 있고, 또 실제로 다쳤으니 사과를 해야겠다, 이런 마음인지요? 얘기가 복잡해보이지만 실제로는 간단합니다. 사과를 할 때 이 모든 것을 인정하냐는 겁니다.
물론 사람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 모든 것을 다 인정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겁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그리고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사과의 진정한 본질과 의미는 여기에 놓여있지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사과의 가치가 더욱 더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대수롭지 않은 것 같은데, 막상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려면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아니 살면서 거의 계속 부딪히게 되는 것, 바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혼동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자존감’이 아니라 ‘자존심’입니다. 우리를 언제든, 그리고 얼마든지 좋은 사람에서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독약이지요.
자존심은 자신의 행동과 상대방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자신을 인정할 수 없고 또 그것이 힘들기에, 너무나 인정하고 싶다고 극단적으로 몰고 간 결과가 바로 자존심입니다. 반대로 자존감은 이 세 개의 영역 다 더도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자존감은 솔직함이고 겸허함이고 떳떳함입니다. 자존감은 자신과 자신의 행동과 상대방을 왜곡시키지 않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행동을 “괜찮아”라는 한 마디로 담담하게 용서할 줄 알고, 상대방에게 용기 있게 다가가 깔끔하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줄 압니다. 자신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이 자존감에는 깔려 있지요. 자존심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할 마음이 없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겠습니다.
前 KAIST 총장, 서남표. 과거에 많은 매체에서 KAIST의 개혁과 혁신과 관련해 다양한 기사들을 쏟아냈지요. 그 선봉장으로서 서 前 총장도 참 많이 언급되었습니다. 국내․외에서 존경을 받는 세계적인 석학 출신이니 사람들의 관심이 배가되는 건 당연한 거지요.
하지만 제가 이 분을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유는 세계적인 석학이어서도, KAIST를 탈바꿈시켜놓은 장본인이어서도 아닙니다. 자존감을 몸소 실천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상대방에게 사과를 하기 때문이지요. 여기에는 물론 KAIST라는 자기만의 철저한 판단기준과 행동기준이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제 생각을 증명할 만한 일화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그는 KAIST를 위하는 거라면 자존심마저 접기도 한다. 한번은 “기획예산처 과장이 대학의 교수 정원까지 관리하느냐”고 공개적으로 말했다가 “KAIST의 예산권을 쥔 관리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는 조언을 듣고 즉시 사과 편지를 썼다. [중앙일보, 2007. 9. 29]
당시 서 前 총장의 연세는 72세였습니다. 52세도 62세도 아닌, 72세. 기사를 자세히 보면 그는 기획예산처 ‘장관’에게 사과를 한 것이 아닙니다. 기획예산처 ‘과장’에게 한 것이지요. 노후를 원 없이 즐길 나이에, 노후를 즐기려면 한참 먼 나이의 사람에게 사과를 한 것입니다. 정말 자존심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왜 그랬을까요? 더 궁금한 것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에겐 자신과 자신의 행동과 상대방을 인정할 수 있는 자존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셋의 의미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는 거지요. 그러니 그에게는 자신이 ‘왜 사과를 해야 하는가’라는 반문 자체가 더 이상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반인인 우리로서는 여전히 쉽지 않은 일처럼 받아들여지는 게 사실입니다. 뭐든 그렇지만, 말은 참 쉽습니다. 오늘부터 자존심 대신 자존감을 갖고, 앞에서 말한 세 개의 영역을 인정하기로 스스로 약속하고, 진심어린 솔직함과 겸허함과 용기를 갖추자고 작심한다고 해서 그것이 쉽게 잘 되던가요? 저도 회사를 다니면서 이런 생각들을 실천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보다 정말 잘 안 되더군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냅둬, 나 이대로 살래!” 외치면서 포기하곤 합니다.
진정한 자존감과 사과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자존감을 지키고 사과를 해야 하는 필연적인 설득력, 즉 자신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한 기준 말입니다. 사과가 자존감에서 비롯된다면, 자존감은 정체성에서 비롯되지요. 셋 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정체성 없이 자존감이 있을 수 없으며, 자존감 없이 사과가 나올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서 前 총장의 사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외부 강연이나 집필로 들어오는 수입을 KAIST 발전기금으로 내놓는다. 승용차 이동 중에 10분 넘는 자투리 시간이 생기면 노트북을 연다. 새벽 서너 시에도 e-메일 답장을 하기도 해 "서 총장은 잠을 자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돈다. 이남구 총장 비서실장은 "서 총장은 개인 일정을 짤 때 'KAIST를 위한 것이냐'를 곧잘 기준으로 삼는다"고 전했다. [중앙일보, 2007. 9. 29]
사과란 것, 참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쉽게 치부해버리기엔 너무나 위험한, 골치 아프고 복잡하고 힘든 숙제입니다. 물론 회사를 다니면서 사과를 해야 할 일이 그렇게 많이 벌어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많이 벌어지든 적게 벌어지든 중요한 건 자신이 사과를, 나아가 사과와 관련된 전체적인 전후 상황을 감당해낼 ‘내공’을 갖추고 있는가, 입니다.
지금 바로 편하게 써먹을 수 있는 ‘사과 전용’ 수법과 기법들은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눈 가리고 아웅’하듯 사과를 하는 한, 우리가 관계에서 원하는 흐름이나 결과는 절대로 얻을 수 없습니다. 식상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불변의 진리, 모든 건 자세와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사과의 본질과 기준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