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몽골
몽골의 아침은 특별하다. 우선 눈을 뜨면 늘 보던 흰 색의 천장이 아니다.
내 방보다 조금 딱딱한 매트리스와 아직은 익숙지 않은 침낭에서 몸을 일으키면 천정의 둥그런 틈에서 햇살이 잠을 깨운다. 바쁜 일정 탓에 아침 잠은 항상 부족했다. 졸린 눈을 비비고 게르를 나서면 진득한 풀 향기와 뜨거운 햇빛이 여기가 서울 아니라는 걸 증명한다.
이튿날 밤, 타미르강 옆 게르 캠프에서 우린 밝고 차가운 밤을 보냈다. 반갑지 않은 비 손님 덕분에 보고 싶던 별빛은 오지 않았지만 맛 좋은 술과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음에 충분했다. 내일의 여행을 기대하면서, 몇몇 멤버들과 아침 해를 보자는 약속을 하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새벽 5시 30분. 눈을 떴다. 아직 밖은 어제 내린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약속했던 햇빛은 짙은 구름에 가리웠다. 고민했다.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미 기대했던 것은 볼 수 없는데. 부족한 잠이 내 몸을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떡진 머리를 모자로 가리고 카메라를 메고 우산을 들었다. 나가자.
흐린 하늘에 캠프는 고요했다. 우산에 부딪히는 빗소리만 간간히 들릴 뿐이었다. 물을 한껏 머금은 잔디는 무척 부드러웠다. 캠프 뒷켠엔 나보다 훨씬 일찍 일어난 양들이 풀을 뜯고 그 주변을 개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개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싶어 한참을 돌아갔다. (사진이 없는 게 너무 아쉽다.)
아무도 없는 길을 혼자 걸어간다는 약간의 긴장감이 좋았다. 목적지는 전 날 멋진 노을을 선물해 준 타미르 강의 한켠. 새벽녘에 떠났던 작가님과 몇몇 멤버들이 텐트를 치고 있을 장소다.
같이 걸었을 때는 금세 도착했던 곳이 혼자 갈 때는 사뭇 달랐다. 비는 계속 내렸고 발도 조금씩 젖어 들었다. 해는 여전히 구름 뒤에 머물렀다. 그래도 조금씩 밝아옴을 느낄 수 있었다. 어제 걸었던 길이지만 분명 무언가 다른 곳이었다. 여행을 다녀온지 한 달이 지나도 여전히 내 머릿 속에 남아있는 건 그 날, 혼자 걸었던 타미르 강의 초원이었다. 특별한 것은 한 가지도 없는, 흐린 하늘의 아침이 내가 오롯이 느낀 적적하고 순수한 몽골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라.
그리고, 도착했다-
여전히 비는 부슬부슬 내렸고, 오는 길에 얕은 강물을 건너야 했기에 발은 흠뻑 젖었다. 세 텐트는 아직 깊은 잠에 머물렀는지 고요했다. 아직 다들 주무시고 있는 것 같아 굳이 깨우지는 않았다. 의자도 갖고오지 않아 앉을 곳도 없어서 그저 흘러가는 타미르 강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조금씩 걷히는 구름 넘어 아득히 먼 곳의 산 능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낮은 구릉 같은데, 실제로 가까이 가 보면 고개를 뒤로 한 껏 젖힐만큼 높은 산이라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밤새 내린 비로 강물은 어제보다 더 힘있게 흘렀고 멀찍히 들리는 동물의 울음소리만 귓가를 울렸다. 적막한 고요- 서울에선 쉬이 느낄 수 없는 순간이다.
십여분 뒤, 몸을 돌려 다시 캠프로 향했다. 아까 올 때에는 못 봤던 야크 한 마리가 강물을 마시고 있었다. 혹여 달려들지 않을까 살짝 겁내며 강을 건넜다. 이 때가 아침 8시, 하루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대충 두 시간의 포근한 잠자리를 포기했지만 지금에선 너무나 만족한다. 나만 가지고 있는 몽골의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놀라움도 대단한 것도 없다. 기대했던 아름다운 일출도 없었다. 그냥 혼자 걸었을 뿐이다. 그랬을 뿐인데 다른 풍경이 내게 다가왔다. 이런 신기한 경험을 한 것은 나 뿐만은 아니다. 여행동안 매일 들었던(마치 원정대의 주제곡 같았던) 이상은 씨의 '삶은 여행'이란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수많은 풍경 속을 혼자 걸어가는 걸 두려워 했을 뿐
하지만 이젠 알아 혼자 비바람 속을 걸어갈 수 있어야 했던 걸"
두려움보단 귀찮음과 달콤한 잠의 유혹이 있었지만 어쨌든 이겨내야 여행이 달라짐을 알았다. '적막한 초원' 나만이 갖고 있는 몽골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