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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기 Jan 24. 2022

내가 사랑한 순애씨

꽈당. 

커다란 마찰음이 공간을 매웠다. 이 소리의 주범은 바로 나. 기다란 바 형태의 기구, 바벨을 어깨 위로 들고 있다가 순간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떨어뜨려야 했다. 보통은 내 몸 앞으로 떨어뜨리는데, 그날은 바벨이 몸의 뒤쪽에 있어 뒤로 떨어뜨렸는데, 떨어지면서 내 허리를 살짝 스친 것이다.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났다.


모든 운동이 그렇지만 크로스핏, 그중에서도 역도 동작을 할 때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사람 몸길이만 한 기구를 들었다 놨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치들은 올바른 자세뿐만 아니라 실패했을 때의 자세도 가르쳐준다. 스키를 처음 배울 때 잘 넘어지는 법부터 배우듯이 바벨을 떨어뜨리는, ‘드랍’을 잘 하는 걸 알아야 역도를 더 잘 할 수 있다. 바벨처럼 무거운 건 떨어뜨리면서 내 몸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주는 것이 관건이다. 보통 앞으로 떨어뜨리면 시야가 확보되니까 내 몸을 어느 정도 피할지 감을 잡기가 쉬운데, 그날은 바벨이 약간 뒤에 있어서 내가 좀 방심했다. 바벨이 뒤로도 알아서 잘 떨어질 거라 믿었던 것이다. 


운동할 땐 정말 단 한순간도 방심하면 안 된다. 크로스핏은 특히 동작이 많고 움직임이 빨라야 하기 때문에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혼자가 아니라 주변에 사람들도 같이 하니까 시야가 넓어야 한다. 내 운동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운동하는 데 피해를 주면 안 되니까. 혼자서 가장 많이 다치는 건 박스 점프할 때다. 고도의 근지구력을 요하다 보니 여러 번 반복했을 때 뛰는 높이가 모자라거나 했을 때 정강이가 박스에 쓸릴 수도 있다. 박스 말고도 다른 운동기구에도 저마다의 변수가 다 있으니 꼭 운동하기 전에 사용법을 숙지해야 한다. 


원래 나는 굉장히 신중한 타입인데 그럼에도 운동하다 보면 한 번씩 실수한다. 바벨이 허리를 살짝만 스친 거라도 통증은 있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더 놀라며 괜찮냐고, 걱정했다. 나는 그들에게 해맑게 웃어 보였는데, 실은 내가 웃는 게 웃는 건지 안 웃는 건지 판단이 서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부딪힌 허리 뒤쪽을 손으로 만져보며 얼마나 아픈지 생각했다. 무거운 쇳덩이가 내 허리를 스쳤는데 아무렇지 않을 리 만무했지만 심각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나중에 멍은 들겠지만 뼈가 다친 건 아닌 듯하여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러고 나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사람들의 집중이 나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동작을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기구를 제대로 피하지 못한 게 훨씬 민망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이런 날도 있는 법이지.


그날 나는 역도 중에 인상, 크로스핏에서는 스내치라는 동작을 했다. 어느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순애씨’라는 애칭까지 생겼더라. 와, 정말 기발하고 재밌는 사람이 세상엔 많은 것 같다. 게다가 이게 이렇게 퍼지는 걸 보면… 이 단어를 처음 발명? 발설? 뭐, 아무튼 처음 얘기한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진다. 


스내치는 몸의 근력과 파워, 유연성, 순발력 등 다양한 신체 기능이 필요한 동작이다. 제대로 하기까지 대단히 많이 연습해야 한다. 여러 번의 코칭과 연습을 하다 보면 조금씩 자세가 만들어진다. 도자기를 빚는 장인처럼 시간을 들여 나의 스내치 자세를 빚어간다. 자세를 익히면 들 수 있는 무게도 늘어간다. 이때 무게가 늘어갈수록 자세가 흐트러지기 때문에 너무 욕심을 부려서도 안 된다. 제대로 된 자세로 들 수 있는 적당한 무게를 찾아 연습하고 또 나중에 조금씩 더 무게를 늘려가고…. 아무튼 그런 맛이 있다, 역도는.


나는 여러 크로스핏 동작 중에서도 스내치를 매우 애정한다. 바벨을 어깨에 한 번 올렸다가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용상보다 한번에 쭉 들어 올리는 인상(스내치)가 더 아름답다. 처음부터 잘하진 못했다. 막 크로스핏을 할 무렵엔 35파운드 바벨로도 들기 어려웠다. 그래도 하다 보면 는다. 몸으로 하는 일은 변해가는 걸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조금씩 무게가 늘고 동작이 세련되는 걸 보며 ‘아, 내가 제대로 하고 있구나.’ 하는 믿음이 생겼다. 운동이 더 즐거워지는 건 덤.


역도는 내가 크로스핏을 하면서 발견한 나의 특기가 되었다. 턱걸이와 같은 체조성 운동에는 약하지만 무게를 드는 데는 나름 자신이 생겼다. 나는 내가 힘이 세다는 사실도 좋아한다. 간혹 사람들이 여자에겐 무거울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내비쳐도 나는 당당히 말한다. “괜찮아요, 저 힘 세요!”


운동을 할 때는 이렇게 힘이 센 걸로 칭찬까지 받을 수 있다. 코치님이나 회원들이 박수를 쳐주거나 엄지를 치켜올려줄 때면 겉으론 미소 짓지만 속으론 엄청 신나게 웃고 있다. 칭찬받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기분이 좋으면 잘하고 싶은 마음도 커진다. 매일매일 운동한 후에 나의 기록을 블로그에 적으면서 나의 무게, 횟수, 동작들의 능력을 가늠해 나갔다. 타인의 인정과 스스로의 흥미는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아지리라는 도전 의식, 비슷한 체급의 다른 회원만큼은 하고 싶다는 향상심을 만들어줬다. 그래서 난 오늘도 체육관에 가면 바벨을 들어 올려 볼 것이다. 

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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