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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기 Feb 08. 2022

아이엠 샘

호칭이 사람을 만든다

제목을 보고 유명했던 영화를 떠올린 사람도 있겠지만 이 글은 그 영화와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임을 밝힌다. 그저 말 그대로 나는 샘(선생님)이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예전에는 사람들과 새로 관계를 맺을 때 언니, 오빠, 선배 등의 호칭을 주로 썼다. 나이나 학번에 따라 호칭을 정했고 자연스레 서열이 생겨 누군가에게는 존댓말을 하고, 누군가에게는 반말을 일삼았다. 그것이 당연한 상식이었다. 


그러다가 주거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면서 호칭이 상대방에 대한 나의 태도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년 남짓 지냈던 주거공동체 사람들과는 이름 대신 별명을 불렀다. 별명 뒤에는 으레 붙는 -씨, -님, -언니, -형, 이런 칭호가 전혀 불필요했다. 대화할 땐 그저 동등한 두 명이 합의하에 서로 존대를 하거나 서로 반말을 하면 되었다. 그래서 다섯 살 위의 S와는 서로 존댓말을 하고 여덟 살 아래의 K와는 함께 반말을 하며 친구로 지냈다.


그 후로 난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에게 ‘샘’이라는 호칭을 주로 쓴다. 퇴사 후 프리랜서로 전향하면서 관료제에 기반한 관계가 줄어들었고, 취미 혹은 취향공동체를 자주 접한 덕분이다. 경우에 따라 누구누구 씨라고 부르기도 하고 누구누구 님이라고 부를 때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전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지고 후자는 왠지 대면이 아니라 온라인 채팅을 주고받아야 할 것 같은 오글거림이 있다. 그에 비해 누구누구 샘이라고 하면 상대가 그 누구라도 부담 없이 편한 마음이 든다. 


이젠 나이를 기준으로 호칭을 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이를 따지지 않으니 낮춰 보거나 낮춰 보일 필요가 없다. 샘이란 호칭은 상대의 나이나 지위 어느 것 하나 분명하게 담아내지 않아서 동등한 관계를 만든다. 서로 불쾌함을 느낄 일도 없고 오히려 존중받는 기분이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샘이라고 불리고 또 부르는 게 좋다. 그러다가 관계가 깊어지고 친근함이 쌓이면 자연스레 새로운 호칭이 생길 것이다. 


내가 처음 샘이라라고 불린 건 대학원에서였다. 원생들은 저마다 나이대가 달랐고 직업과 지위도 달랐다. 그곳에선 이미 서로서로를 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는 으레 그렇듯 선후배로 호칭이 정해지지만 그 기준은 입학시점이다. 대학원에서 나보다 한참 나이도 많고 사회경험도 많은 분이 내가 입학한 다음 해에 들어왔다고 해서 내가 그분을 후배님이라고 부른다면? 어후,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1년 정도 되었을 때 진짜로 샘이 되었다. 학원에서 중학생들을 가르치는 파트타임 강사로 일을 시작했다. 가르친다는 건 예전의 나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다. 가르치기 위해 더욱 열심히 공부했고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말하기를 연습했다. 기존에 했던 밥벌이와 전혀 다른 방식이라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치열하게 일할 수 있었다. 강의하는 일을 1년도 채우지 못한 시기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함덩어리였다.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때론 못난 방법을 취하기도 했다. 학생들에게 화를 냄으로써 교실에서 절대권력자의 행세를 부렸다. 그러면 수업 시간만큼은 내 뜻대로 되(기도 했)지만 집에 오면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느꼈던 건 갈등을 해결하는 데 있어 화라는 감정을 앞세우는 건 게으른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 상황을 빨리 벗어나기 위한, 가장 노력이 덜 드는 방법인 것. 가르치는 일로 내 인격의 현주소를 보았다. 이후 다양한 연령층을 가르치게 되면서 소통하는 방법을 하나둘 터득해갔다. 그건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하는 정답이 있는 일은 아니다.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입장에 앞서 학생들의 눈을 바라보고 말과 행동에 귀 기울여야만 알 수 있는 일이다. 시행착오와 반성 속에서 조금씩 유연함을 갖춰갔다. 


때론 샘이라는 이유만으로 분에 넘치는 호의를 경험하기도 한다. 매 순간 잘했던 게 아닌데 과연 호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싶어 괜히 숙연해진 적도 있다. 샘이라는 호칭에는 배려와 존중뿐만 아니라 책임감 또한 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누군가에게 샘이라고 불릴 때 좀 더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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