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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기 Aug 30. 2022

박스에서 만난 빌런

크로스핏이 내 삶으로 들어온지도 벌써 7년이 흘렀다. 몸의 근력이 늘고 마음도 단단해지는 것을 넘어 여러 번화를 겪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걸핏하면 와드(WOD)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물 2리터짜리 여섯 들이를 들고 편의점에서 집까지 걸어갈 때, 문앞에 놓인 택배박스의 12킬로그램짜리 고양이 모래를 들 때, 약속 시간에 늦어 5분 안에 외출 준비를 마쳐야 할 때, 대용량으로 산 토마토나 밤호박 같은 식재료를 손질해서 보관할 때, 이 모든 게 크로스핏 운동을 일컫는 와드가 된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조차도 운동으로 인식하는 것, 크로스핏터라면 못 참는 일 중 하나다.


헬스는 짐(gym), 실내암벽등반은 암장, 수영은 수영장, 요가는 요가원, 크로스핏은 박스(Box)다. 차곡차곡 쌓인 운동 기구들과 탁 트인 공간이 마치 창고(Box)를 연상케 해서 박스라고 부른단다. 박스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운동도 하고 커뮤니티도 만드는 재밌는 공간이다. 그룹수업으로 이루어지는 운동이다 보니 다른 운동에 비해 회원들과의 소통이 활발한 편이다. 비슷한 시간대에 와서 자주 보거나 수업 외 시간에 운동을 더 하면서 스몰토크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근한 관계가 형성된다. 물론 박스마다 분위기는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말이다. 


크로스핏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곧장 갔다. 와드는 보통 20분이 넘지 않는데도 준비운동을 하고 동작을 배우고 마무리 스트레칭까지 하고 나면 수업 50분이 결코 만만친 않아 온몸이 소진되어버린다. 얼른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혼자서는 다른 운동을 할 줄 몰랐다. 점점 몸의 운동신경이 향상되고 부족한 걸 연습하고 싶은 마음이 늘면서 수업 외 시간에도 박스에 머무르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늘었다. 수업이 끝난 뒤 부족한 동작을 단련하고 있으면 인사만 주고받던 회원들과도 조금씩 더 얘기하곤 한다. 그렇게 사람들과 함께 박스 안에서 근육과 친밀감을 점점 쌓아간다.


내가 원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크로스핏을 잘 하지 않는다. 친구나 지인들과 크로스핏 얘기를 하다보면 나더러는 대단하다든가, 재밌겠다든가 호기심을 보이지만 막상 하자고 제안하면 내켜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쉬울 건 없다. 어차피 박스에 가면 나와 같이 크로스핏을 좋아하는, 운동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 천지니까. 같은 관심사를 가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설레고 즐거운 법이다. 게다가 운동하는 사람 중에는 나쁜 사람은 없다, 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있어 박스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럼에도 어느 집단에나 간혹 마음에 들지 않거나 별로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기 마련. 반대로 내가 누군가에겐 맘에 들지 않거나 별로라고 생각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어쨌든 이 글은 내 글이니까 내가 박스에서 만난 빌런들을 소개한다.


1) (우)맨스플레인형

크로스핏에 입문해서 동작도 서툴고 잘 하지 못할 때, 내게 이것저것 가르쳐주려는 회원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혼자서 풀업(턱걸이) 연습을 하려고 철봉에 밴드를 걸고 몸을 앞뒤로 왔다갔다 아등바등하고 있노라면 그 회원이 다가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 오랫동안 운동한 티가 팍팍 나는 그 회원은 자신의 경험칙을 바탕으로 초보인 내가 겪는 시행착오를 줄여주고 싶었으리라. 확실히 내게 도움 되는 꿀팁들은 고마웠다. 그런데 내가 수업 중 코치님의 설명대로 동작을 하고 있는데 수업도 듣지 않던 그 회원이 내 옆에 와서 동작에 대한 조언을 할 때가 있었다. 이 상황이 혹여나 코치님에게 불쾌할까 걱정하면서 동시에 그 회원의 말도 무시할 수 없어 나는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었다. 뭐든 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한다고, 적당한 관심과 조언은 고마웠지만 시도때도없는 (우)맨스플레인은 곤혹스러웠다. 나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운동을 하고 있다가 예기치 않은 정보를 받게 돼 신경만 쓰였다. 물론 자신이 알고 있는 걸 알려주려는 선한 의도를 모르지 않고 또 모른 체하고 있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나도 웬만큼 동작이 익숙해지자 가끔 동작을 어색하게 하는 회원들을 보며 ‘이렇게 하면 더 잘할 텐데….’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래도 웬만해선 상대방이 먼저 물어보지 않는 이상 말을 삼간다. 그 회원과 유대감이 별로 쌓여있지 않기도 하고 상대방은 괜한 지적질로 생각하거나 오지랖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도 친근한 사이라면 괜찮은 말도 전혀 모르는 사이일 때 들으면 기분이 썩 좋진 않다. 그럴 땐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으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고 만다.


2) 마마스칠드런형

예전에 캘리그라피를 한창 배울 때, 코치님이 박스에도 붓글씨 하나 써 달라고 하길래 어떤 걸 써 드릴까요? 해서 이런 문구를 적어 주었다. ‘니가 흘린 땀은 니가 닦고 가라, 탄마가루도!’ 와드의 특성상 초 단위로 시간을 쪼개고 가능한 한 무겁게, 가능한 한 많은 횟수로 동작을 수행하기에 굉장히 많은 땀을 흘린다. 동작을 수행하며 흘린 자신의 땀과 도구를 미끌리지 않게 잡기 위해 바른 탄(산)마(그네슘)가루는 스스로 닦고 치우는 것, 함께 운동하기 위해 지켜야 할 공공연한 에티켓이다. 하지만 누구나 흘리는 땀이기에 어느 정도 용인되는 범위에서는 땀을 발견해도 이해한다. 기분 나쁠 일도 아니다. 내가 생각할 때 진짜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사용한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않는 것이다. 플레이트, 바벨, 박스, 덤벨, 케틀벨, 메디신볼 등 박스에는 여러 가지 운동 보조 기구가 있다. 그뿐 아니라 개인별로 벨트를 비롯한 각종 보호장비며 수건과 종이컵도 자주 사용한다. 사용한 물건은 제자리에, 다 쓴 수건은 탈의실에 치우기! 생각보다 사람들이 깜박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가끔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경우도 있는 것 같고. 그럴 때면 ‘쓰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따로’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 말, 한번쯤 엄마한테 듣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걸? 그런데 내가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은 따로 있다. 내가 사용하려고 빼둔 장비를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가 쓰는 행동. 그걸 목격하면 정말 3초 정도 정지상태가 온다.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러는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가져오는 사람 따로, 사용하는 사람 따로’냐고 따져묻고 싶은 걸 꾹 참는다.


3) 어따대고자기야형

크로스핏은 기본적으로 혼자 하는 운동이지만 옆에 있는 사람과 파트너가 되어 같이 연습을 하거나 보조를 해주거나 서로 저지(심판)를 봐주기도 한다. 그래서 운동을 할 때 느낀 개별적 고통을, 운동을 끝낸 후 함께 나누며 동지애가 싹튼다. 가끔 파트너 와드라도 할 때면 동지애는 두 배가 된다. 에피쿠로스학파에서 얘기하는 고통 후에 진정한 쾌락이 찾아온다는 말은 운동을 두고 하는 것이리라. 고통스러운 순간을 참아낸 뒤 비로소 오는 이 쾌감은 혼자보단 함께 나눌 때 더 즐겁다. 그래서 박스에서는 땀 흘리는만큼 말도 많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하루는 와드를 끝내고 함께 운동한 회원이 나의 이름과 나이를 묻길래 말해줬더니 자연스럽게 말을 놓으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호칭을 ‘자기’라고 하는 것이다. 예전에 직원이 나밖에 없는 회사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는데, 사장님이 나를 부를 때 ‘자기’라는 호칭을 붙여 불러서 한바탕 싸우고 그만뒀다. 연인 사이에 으레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당신, 그대처럼 상대방을 지칭하는 명사이지만 습관적으로 듣다 보면 왠지 불쾌해지는 단어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반말을 하는 것도 이해하고, 나를 친근하게 생각해주는 것도 감사한 일이긴 한데, 어째 나는 그 회원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 내가 새로 알게된 사람에게서 호감을 느끼는 건 매우 사소한 배려들을 느낄 때인데, 그 배려가 느껴지지 않아서 비호감이 된 사람이다. 


그 외에도 나는 저지(심판)를 해줄 때 갯수 틀리게 세어주는 것에 민감하다. 숫자가 많아지면 헷갈릴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집중해서 해주면 좋겠다는 마음. 내가 한 횟수보다 덜 세어주는 것은 무조건 싫고 많이 세어주는 것도 썩 좋지 않다. 나는 기록마니아라서 정확한 기록이 운동만큼이나 중요하다. 크로스핏터의 장비사랑은 나도 멈출 수 없는데, 그래서인지 운동하고 나면 장비를 벗어던지는 게 간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다만 앞서 말한 탄마가루를 손바닥에 바를 때에도 과도하게 털면 가루가 날려서 별로다. 탄마가루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발라줬으면 한다.


물론 박스에는 위에서 언급한 빌런들보다 좋은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덕분에 좋은 기운을 받으며 즐겁게 운동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생각해보면 빌런들이 종종 반면교사 역할을 해주니 내일의 빌런은 내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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