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뵙겠습니다.
안준호(이하: 안): 안녕하세요. 참포도나무교회 담임 목사, (주)달려라커피 대표. 안준호입니다.
다중직 목회 대표자 중 한 명이잖아요.
안: 스님이나 신부님은 결혼을 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교회 목사는 달라요. 결혼을 하면 가족이 생기고, 이를 책임지는 가장이 돼요. 어쩔 수 없이 돈이랑 얽히게 되는 거죠.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것만이 목회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단순히 목회를 설교하는 것, 교회를 설교 듣는 곳으로 축소시켰어요. 오늘처럼 저를 만나러 오는 분과 대화를 나누고 창업 상담도 하면서, 함께 고민하는 것이 경계 너머의 사역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경계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안: 교회와 사회가 정한 틀, 집단의 정치적, 문화적 경계를 허무는 역할로써 목회를 하고 싶어요. 다중직 목회가 단순히 돈을 버는 역할이 아니라는 거죠. 제가 목사로 있는 의 교인이 100명 되는 게 목표가 아니라, 제 사업체 가 100명을 고용할 수 있는 회사가 되길 바라요. 100개의 가정이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거죠. 교인에게 헌금을 걷는 게 아니라 회사를 통해 경제적 자립을 이루고 가깝게는 직원과 가정, 크게는 사회에 복음을 전하는 구조를 만드는 게 제 목회 비전이에요.
목사라는 직업을 떠올리면, 설교하는 모습만 떠오르는데요. 커피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안: 저도 제가 이렇게 다양한 직업을 갖게 될 줄은 몰랐어요. 신학생 시절 학업을 잠시 중단하며 잠시 직장 생활을 하게 됐는데, 7년이나 하게 될 줄도 몰랐고요(웃음). 이후 학교에 돌아와 학업을 마치고 교회를 개척했어요. 당시 교회에 제 모든 걸 걸었는데, 아무도 교회에 오지 않더라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어요. 사람들에게는 기독교라는 종교나 신앙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요.
그래서 제가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이라는 <커피 마을>이라는 작은 카페를 열었어요. 역사적으로 절이나 교회, 성당이 마을 사람들이 교류하는 장소로써 역할을 해왔는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카페 <커피 마을> 은 마을 공동체로써 작용했나요?
안: 제가 목사지만, 카페에 방문한 이들에게 기독교를 전하려 하지는 않았어요. 지금도 누군가를 개종시킬 생각은 없고요. 그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거든요. 교회에서는 다들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요.
스스로 작은 교회 목사라고 칭하는데, 한국의 대형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나요?
안: 이런 말이 있죠. '기독교는 미국에서 자본주의가 됐고 대한민국에서 대기업이 됐다.'라고요. 한국 대기업의 특징이 있어요. 바로 세습이죠. 한국 대형 교회도 마치 필연적으로 세습을 해요. 권력과 자본이 담임 목사에게 집중돼 있으니까요. 그에 따른 이해관계도 다양할 것이고요. 사실 대형 교회가 되면 자본의 문제를 극복하기 쉽지 않을 거예요. 정체성을 지키기 어려워지겠죠.
사실 대형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에 반한다고 생각해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이 시대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목회자와 교회 공동체가 많아져야 해요.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고 공익적 가치를 쫓아야 하겠죠. 교회 건물의 크기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이런 말을 많이 해서 대형 교회 목사들이 저 싫어해요(웃음).
처음에 개척할 당시에도 이처럼 작은 교회와 비전을 염두했나요?
안: 성경에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 천국이 저희 될 것이오.'라는 구절이 있어요. 이게 저의 복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가난하게 살아도 괜찮지만, 사실 쉽지는 않아요. 하지만 교회는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보거든요. 약자와 가난한 이들을 도우미 더불어 살아야 해요.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런 일에 관심이 없더라고요. 제가 생각하는 목회랑 많이 달랐어요.
앞에서도 말했듯 교회가 커지면 정체성이 상실될 수 있어요. 그래서 작은 교회를 지향해요. 만약 저희 교회에 성도가 500명 정도 나오게 된다면, 그때는 오로지 저 자신을 조심해야 해요. 그만큼 권력이 커지니까요.
커피 이야기를 좀 더 나눠보죠. 10년 전 <커피 마을>로 시작해서 지금은 <브리딩 커피바>를 운영 중인데요. 긴 시간 동안 기억에 남는 손님이 분명 있겠죠?
안: 운영 초기에, 제 나이 또래의 중년 여성분들이 가게에 오셨어요. 나누시는 대화를 들어보니 이곳에서 나고 자란 분들인데, 근처에서 동창회를 했나 봐요. '고향에 20년 만에 왔는데 이곳(커피 마을)이 있어서 참 좋다고, 10년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길 바란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분들이 기억하도록,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맞은편의 <커피 마을> 간판을 아직까지 달아뒀죠. 꼭 다시 방문하셨으면 좋겠어요.
현재는 커피 트럭 서비스인 <달려라 커피>도 운영하잖아요.
안: 세월호 참사 때 <커피 마을> 문을 닫았어요. 주로 오는 손님이 목사님들인데, 이곳에서 커피 마시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겠더라고요. 가게 문을 닫고 팽목항으로 갔어요. 그곳에서 커피 봉사를 했죠.
이후 아내가 '차라리 커피 트럭을 만들어보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에, 푸드 트럭을 개조해 지금의 를 시작하게 됐죠. 촬영장이나 야외 웨딩 등의 행사에서 커피를 대접하며, 적지 않은 수익도 내고 있고요. 저희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단골이 많아요. 한 번 연이 닿은 고객은 계속 불러주거든요. 주변에 소개도 해주고요.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노하우가 궁금한데요.
안: 저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상으로 준비해요. 대신 마진이 높지는 않죠. 그런데 그게 비결인 것 같아요. 고객도 다 알거든요. 그리고 매번 새로운 걸 시도하려고 해요. 같은 행사라도 배너를 바꾸거나, 트럭에 전구라도 다는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요.
그리고 전국 어디나 같은 가격이에요. 서울도 150만 원, 부산도 150만 원. 다른 업체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조만간 카메라도 하나 사려고 하는데, 고객들이 저희 커피를 먹고 느끼는 즐거움을 기록하고 싶어요. 사진도 전달하고요.
자료를 찾던 중, 자립준비 청년들과 함께 일했다는 기사도 확인했어요. 어떻게 그리고 왜 이들과 함께 일하게 된 건지도 궁금하네요.
안: 몇 년 전, 청년 자립을 돕는 한 단체에서 저에게 자문을 요청했어요. 제가 하고 있는 커피 트럭 사업을 권했고 청년들에게 커피 교육도 했죠. 그때 고립청년, 자립준비청년들의 문제를 알게 됐어요.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그 단체가 정작 청년들을 고용하지는 않더라고요. 알고 보니, '청년'이라는 단어를 빌려 사업비를 받는 게 목적이었던 거죠. 일자리를 통해 그들 삶에 변화가 생기고 자립을 돕는 게 아니라, 다시 재고립 되는 구조였어요. 그래서 를 법인화하게 됐어요. 제가 직접 청년들을 고용할 수 있도록요.
이후 그 단체와의 관계는 어떻게 됐나요?
안: 헤어졌죠. 거기 있던 청년들도 뿔뿔이 흩어졌고요. 국내 약 50만 명 정도의 자립준비청년이 있다고 해요. 결국 문제는 일자리거든요. 문제를 해결하는 건 단순해요. 고용 창출. 조만간 다시 청년들을 위한 커피 수업도 진행하려고 해요. 이후에서 근무도 할 수 있도록요.
그리고 자립준비청년, 고립청년. 이런 식으로 그들을 부르는 순간 낙인이 생겨요. 그래서 저는 '모모'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미하엘 엔데의 소설 속 주인공도, 다른 이들과 조금 다르지만 자신만의 시간을 견디고 다른 이들에게 공감하잖아요. 또 다른 소설에서 모모를 돕는 '로자'도 있고요.
세상에 다시 나가고 싶은 청년에게 막연한 안타까움이나 걱정이 아니라,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고립의 고리를 끊도록 '모모'와 '로자'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일을 하고 싶다면 직장을 연결해 주고 공부를 하고 싶다면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거죠. 저는 교회를 단순히 '죽은 다음 천국에 갈 수 있는 통로.'라고 치부하는 게 정말 싫거든요. '지금 당장의 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봐요. 그들이 겪는 가장 큰 문제가 고용인데, 흥미를 가지는 영업장에서 일을 배우며 사회에 한 걸음 내딛을 수 있게 되니까요.
제 친구도 한 단체에서 '로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오히려 단체 직원들이 '모모'를 대하기 어려워한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친구는 혼도 내고 가끔 따끔한 소리도 한다더군요.
안: 맞아요. '로자'가 '모모'에게 매일 잔소리하고 혼내지만, 그럼에도 옆에 붙어있거든요. 누구나, 누군가에게 '로자'가 될 수 있어요. 카페에서 처음 본 저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이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는 이유가, '자신을 전혀 모르는, 오늘 보고 말 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럴 때는 기꺼이 누군가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주는 거죠. 가톨릭 교회가 하는 '고해성사'처럼요. 성도들이 자신의 고민이나 문제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 이게 교회의 역할, 목사가 해야 될 일인 거죠.
아무리 사명이라고 해도, 쉽지 않을 것 같거든요. 감정 쓰레기통.
안: 처음에는 저도 힘들어서 기도를 많이 했어요. 골방에 박혀서가 아니라 산책하고 오토바이 타면서 하나님을 떠올렸죠. 이런 시간이 오히려 저에게 치료가 됐고요. 한 정신과 의사분은 집에서 설거지하는 게 본인만의 힐링 방법이래요.
카페뿐만 아니라 목공소도 운영했잖아요.
안: 카페 때문에 시작한 거죠. 비용 문제로 셀프 인테리어를 해야만 했거든요. '이걸 다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걱정이 있었는데, 목공을 하다 보면 그런 걱정마저 잊게 돼요. 엄청 집중하거든요. 우리 삶을 바꾸는 건 정말 어렵잖아요. 새벽에 일찍 일어나기, 운동 30분씩 하기 등등요. 그런데 목공은 눈에 보이는 것에 즉각적인 변화를 줄 수 있어요. 가장 쉽고 명확하게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목수가 예수님일 텐데요. 기독교 신앙과 목공에서 공통점을 찾기도 했나요?
안: 목공은 노동자의 언어예요. 예수님도 목수, 노동자였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직관적인 언어를 사용했어요. 당시 선생들과는 달랐죠. 추상적이거나 어렵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저는 현대인의 문제가 수작업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 거라고 보거든요. 도시, 아파트에서 살다 보니 손재주를 키울 필요도 없고요. 손으로 하는 노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신학도 노동이 필요하고요.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노동이죠. 예배도 마찬가지고요. 예배의 어원도 '일하다, 노동하다, 섬기다'라는 뜻의 히러비어 아바드.(עבד)에서 유래됐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를 무시고 노동을 천시하게 됐어요. 예수님도 노동자셨잖아요. 회당 안에서 설교를 하던 게 아니라, 거리에서 천시받던 사람들을 직접 만났죠. 오히려 회당에서는 '독사의 자식들'이라며 쓴소리를 하기도 했고요. 저는 노동의 재발견이 이 시대의 과제라고 생각해요.
커피차 서비스 <달려라 커피>도 직접 제작했죠?
안: 지금까지 8대 만들었어요(웃음). 커피 트럭이나 푸드 트럭을 제작하는 업체도 있지만, 그들이 커피 서비스를 하는 건 아니라, 당사자인 저에게는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발전기 대신 배터리를 사용한다던가, 주문을 받고 커피를 내주기까지의 동선을 생각해서 만들 수 있었어요. 이것도 제가 목공을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죠.
커피 트럭 시장을 선도하고 싶어요. 커피 한 잔을 통해 누군가를 만날 수 있고 자신을 홍보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잖아요. 에서 사용하는 원두를 직접 로스팅하는데, 한 달에 300kg 정도 볶아요. 외부에 유통하지 않고요. 그래서 제가 커피차 서비스에서 경쟁력을 가졌다고 생각해요.
오토바이는 어떻게 타게 됐나요?
안: 지금은 집에서 편하게 식자재를 주문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마트나 시장에 직접 가야 했잖아요. 차로 가면 주차도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려서, '오토바이로 다녀오면 편하겠다.'라는 생각에 2016년에 처음 구매했죠.
목사와 오토바이. 참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은데요. 다른 이들의 시선은 어땠나요? 특히 다른 목사님들이 어떻게 바라봤는지 궁금하네요.
안: 한국에서 목사나 교수라고 하면 권위적인 느낌을 주는데 반해,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서 그런지 학생들은 저를 친근하게 생각했어요. 다른 목사님이나 교수님들은 아마 당연히(?) 안 좋게 봤을 테고요(웃음). 신학교 강의 갈 때는 일부러 오토바이를 타기도 했어요. 그들에게 새로운 도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요?
안: 네 바퀴에 의존하는 삶은 지루하게 그냥 굴러가는 거예요. 그런데 두 바퀴는 달라요. 항상 운전에 집중하며 주위를 살펴야 하죠. 이러다 보니 삶을 더 가깝게, 살아있음을 느끼는 때가 많아요. 가끔 운전하며 죽음에 대한 생각도 하고요. 대부분 사람들은 네 바퀴처럼 인생을 철부지처럼 살아가요. 저는 오토바이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현재에 적응하고 안주하는 게 더 위험하죠.
오토바이처럼 모험과 열망이 있는 삶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오토바이가 위험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것을 감수하고 타는 거죠. 사고가 날 수도 있고요. '백 살까지 오래 살아야겠다.'라는 생각보다, '내가 살아있는 지금을 좀 더 나답게 살고 싶다.'는 것뿐인 거죠. 오토바이를 탈 때만큼은 누군가의 남편이나 목사로서가 아니라, 인간 안준호가 되니까요. 이런 작은 일탈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오토바이를 탈 때예요.
목사님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안: 스스로 행복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일에서도 행복을 느끼는데, 요즘 일이 많아져서 걱정 아닌 걱정이에요(웃음). 무엇을 하든지 재미와 행복을 느껴야 본인에게도 사람들에게도 기여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거든요. 이런 의미에서 오토바이는 저에게 행복이죠.
2025년 2월에 커브로 첫 전국일주를 했어요. 삶에 도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새로운 도전을 한 거죠. 돈 벌려고 배달도 해봤어요. 코로나로 모든 행사가 취소되니까 커피차가 갈 곳이 없더라고요. 힘들어서 포기하려고도 했는데, 그 모든 과정에서 오토바이는 항상 제 옆에 있었어요. 어려운 시기에 오토바이가 저한테 되게 많이 도움이 됐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안: 오토바이 라이더 수는 늘어난 데에 비해, 사회적 인프라는 아직인 것 같습니다. 차도 위에서 당하는 대우만 봐도 알 수 있죠. 아직은 이륜차를 배려하는 문화가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오토바이를 타는 이들이 먼저 교통질서를 잘 지켜야겠지만요. 오토바이를 안전하게 탈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하루빨리 갖춰지면 좋겠어요.
글 · 사진 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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