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림이는 21개월 된 암컷 셜티(셔틀랜드 쉽독)이다. 양치기 개라는 혈통인데다 그 나이답게 활발하고 호기심 대마왕이다.
어쩔수 없이 나도 달리게 되었다. 산을 뛰어오르다니... 1년 전까지만 해도 아파트 계단 세 칸에도헉헉댔는데....
지난해 자궁 근종 수술을 받았다. 하혈이 드디어 멈췄다. 몸에 칼을 안 대고 자연 치유로 낫게 하자는 생각은 '만병통치약'이아니었다.
근종은 악성 종양이 아니어서 의사들도 안심하라 한다. 하지만 위치에 따라 하혈을 유발할 수 있다.
3년 동안 하혈이 멈추기를 기다린 건 약간의 보약과 휴식, 균형 잡힌 식사, 적절한 운동으로 나을 수 있을 거라 믿어서였다. 예전에 난소 종양도 그렇게 해서 자연히 나은 적이 있었다.
의사들의 의견이 분분한 것도 수술을 미룬 이유였다. 당장 수술하라는 개인병원, 대기하다 6개월 뒤 하라는 대형병원, 몇 해 안에 폐경이 올 수 있으니 놔둬도 된다는 한의원, 이렇게 의학적 소견이 다 달랐다. 하혈을 그냥 중년에 흔히 겪는 부정출혈쯤으로 생각하게 된 이유이다. 코로나 시국도 이런 버티기 작전에 명분을 줬다. 참다 못한 몸이 드디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겨울.
몸 여기저기가 발긋블긋 좁쌀 같은 것들이 돋아났다. 보습 로션으로도 가라앉지 않더니 그 부위가 바나나처럼 갈변되었다. 겨울철 손님인피부 건조증인 줄 알았는데 이건 뭐지?
피부과를 찾았다. 혈액 검사 결과 '비타민 D'와 철분' 부족이라 했다. 보릿고개 시대도 아닌데 '빈혈'이라니? 문득 내 몸이 유기체란 데 생각이 이르렀다.
'피부야, 고마워!'
피부는잊고 있던 자궁 근종을 생각나게 했다. 그 길로 가장 빠른 수술 날짜를 잡았다.
내시경 수술은 생각보다 간단했고 후유증도 없었다. 문제는 몸의 회복이었다. 삼시 세끼를 '빨간 고기'를 먹어 빈혈을 없앴다. 비타민 D를 영양제로도 먹고 주사로도 보충했다. 산책도 매일 하며 체력을 조금씩 회복해 갔다. 하천길을 따라 매일 걸었다.
문제는 산이었다. 멀리도 아닌 집 근처 산에 오르고 싶었다.가족 중 나와 산을 함께 오를 사람이 없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동네라 아는 이웃도 없었다.
궁리 끝에 남편에게 결혼기념일 선물로산에 같이 가자고 했다.평일은 일, 휴일엔독서인 남편. 결혼기념일을 외식도 장미꽃 백 송이도, 목걸이도 아닌 등산으로 퉁친는 데 혹한 건지 큰 마음 먹고 책을 내려놓았다.
오 분쯤 갔을까. 남편이 걸음을 멈췄다. 숨을 쌕쌕 몰아쉬는 나를 뒤돌아보더니어이 없어 했다.
"애개... 뭐야? 하하하."
남편은 회사에서 전 사원 등산의 날 정도가 돼야 산을 오른다. 땀나는 게 싫다며체육대회 때에도 줄다리기만 출전한다. 앉아서 잠깐 용쓰면 된다나.
그런 남편 보다 매일 걸은 내가 더 산을 못 오르다니. 내 저질 체력에 실망했다.
'꾸준히 오르다 보면 언젠가 이 산쯤이야 펄펄 날겠지.'
각오를 다졌지만 결혼기념일은 일 년에 한 번뿐, 다음 등산까지는 1년을 기다려야 했다.
혼자오를까 생각했지만 사람이 거의 없는 산을 오르기가 두려웠다. 20대 때는 야근 후 골목길도, 혼자 오르내리는 산길도 두렵지 않았다. 예전 살던 동네의 산에서 실종된 여자가 발견된 뒤로 나는 혼자 산에 가는 걸 꺼리게 됐다.
그런내게 다시 산을 되찾아 준 건 남편도 자식도 이웃이나 친구도 아니었다. 태어난 지 고작 1년 하고 몇 개월 더 된 셜티, 우림이. 이 녀석의 양치기 유전자는 산비탈을 오를 때 잘 드러난다. 3중모 털을 휘날리며 내달리는 녀석을 따라 어느새 나도 달리게 되었다.
'어라! 이 동작 왠지 익숙한걸.'
공원에서 올라타본 운동 기구가 생각났다.
'아하! 이게. 크로스컨트리구나.'
6개월 전만 해도 몇 미터만 올라도 나무에 기대 쉬던 나였다.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에 빙의한 듯, 트래킹 화에 날개가 돋아난 것 같다. 산을 뛰어오르는 건 산꾼들이나 가능하다 여겼거만.
개와 함께 달리는 시간, 나는 두려움을 잊는다. 산도 사람도 다가오는 나이도... 이것이 자연치유다. 개는 내게 멋진 루틴을 선물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