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이 길은 '클래식'

315km, 순례길의 마지막 날.

by 서은


순례자들의 클해식한 필수품

열네 번째 순례잡기


거리 : 19.3km

시간 : 08시 - 14시

도시 : 페드로우소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Pedrouzo - Santiago de Compostela














레온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총 315km,

오늘, 14일의 여정이 끝난다.


오늘은 조금 늦게 눈을 떴다. JH언니는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정오에 시작하는 향로 미사를 보고 싶다며, 평소보다 이른 새벽에 서둘러 출발했다. 하지만, 나와 친구는 마지막 산티아고 순례길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 오늘은 조금 더 천천히 걷고, 조금 더 오래 머물기로 했다.


레온에서 순례길을 시작할 때부터 목적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였지만, 도착해서 얻는 벅찬 감정보다는 315km의 길 위에서 고요한 감정과 풍경을 더 누리고 싶었다. 마지막 알베르게에서 배낭을 싸서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새벽공기 대신에 따뜻한 햇살이 있다.


스틱 랭귀지에 능통한 순례자

알베르게에서 얼마 걷지 않았는데, 예쁘장한 금발의 청년이 되돌아오고 있다. 이유를 물으니 화살표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길을 잃어 본 우리는 바로 휴대폰을 꺼냈고, 셋은 길 위에 멈추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때 길 건너편에 있던 순례자 할아버지가 스틱으로 방향을 가리킨다. "쭉 가서 오른쪽으로 가면 돼" 말은 하지 않아도, 완벽한 바디 랭귀지이다.


우리가 이 길이 맞는지 모르겠다며 망설이자, 네덜란드에서 온 팍은 "만약에 길을 잃어도 셋이 함께 길을 잃을 테니, 괜찮다"며 우리와 함께 걷는다.


길을 잃어도 되는 곳.

다시 돌아가면 되는 곳.

그곳이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결국 우리는 할아버지의 스틱 랭귀지 덕분에, 쉬이 다음 화살표를 찾았다. 오늘은 구글맵보다 할아버지의 스틱 끝을 믿고 걷기 시작했다.


친구와 같이 걸었지만, 또 따로 걸었다.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걸었다.

아침에 같이 출발하고, 각자 걷고,

중간쯤 카페에 들러 함께 커피를 마시고, 다시 따로 걷다가,

결국 같은 곳에 도착해 같은 저녁을 먹는다.


아침엔 내가 앞서서 걸었다. 하루 충분히 자고 나면 발바닥도 무릎도 아프지 않아 정신도 몸도 가벼웠다. 중간쯤 오면 친구의 부스터가 켜진다. 어느새 저 멀리 친구의 뒷모습이 보인다. 친구는 찌뿌둥한 아침을 지나면 몸에서 활력이 생긴다. 머무를 동네에 가까워지면 나는 뒤처져 있다. 친구가 앞에서 기다린다. 불타는 발바닥을 끌고 겨우 알베르게에 도착한다.


걷는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그렇다고 특별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도, 과거에 대한 후회도, 이 길 위에서는 크게 소용이 없었다.


대신, 걷는 길 위의 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햇빛, 바람, 풀 냄새, 녹색의 푸르름, 맑은 하늘, 새소리, 때로는 자동차 소리까지,


오늘도 우리는 따로 걷다가 산티아고 공항 옆에 있는 카페에 같이 도착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카페이다.

Porta de Santiago.

'산티아고로 향하는 문'이라는 카페에서 잠시 멈췄다.


뜨거운 커피와 슈가파우더를 솔솔 뿌린 치즈케이크를 시켰다.

카페에서 올드팝이 흘러나온다.

턴테이블이 돌아가는 듯한 지지직거리는 소리마저,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카페는 마지막날의 아쉬움을 달래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계속 걸어야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멈춰도 되는 시간이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걷는 순례자들

카페에서 나오니 바닥이 축축하고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비가 오는 것조차 아름답게 느껴지는 마지막 날이다.


걷는 내내 날씨의 축복을 받았던 우리.

배낭 깊숙이 들어있는 판초를 쓸 기회이다.

비가 많이 오는 것도 아닌데, 마지막 준비물을 꺼내 본다.

앞에 순례자는 비닐로 가방을 둘러싸고 걷는다.


촌스럽지만, 결국 깨닭게 된다.

걷는 데에는 많은 준비물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항상 매트를 배낭 위에 달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오늘은 혼자 마을 정류장에 앉아 자신만의 카페를 만들었다. 매트를 깔고 앉아 배낭에 다리를 올리고 있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자,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신다. 본인이 가지고 다니는 커피 장비를 보여주며 말한다. 순례자는 이래야 한다고.


우리가 찍은 사진을 보여달라고 해 필름 카메라라고 하니 'CLASSIC!'을 외치신다.


클래식한 순례자


할아버지를 만난 후에 클래식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 길 자체가 클래식 아닐까?

성야고보가 잠들어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수백 년, 수천 년 전 순례자들의 그림자를 따라서 걷고 있는 사람들.


낡고 불편하지만, 이상하게 끌리는 방식.

비효율적이지만, 계속 이어지는 여행.


화살표를 보고 걷고, 길을 잃고, 다시 찾고,

모르는 사람에게 방향을 묻고,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며,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길 가운데 앉아 커피를 끓여마시기도,


누군가는 길게, 누군가는 짧게,

누군가는 프랑스에서, 누군가는 포르투갈에

목적지는 같지만,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길.


그렇게 이어지고 있는 이 길.


이제 종교적 신앙이 없는 이들도 걷는 길.

수많은 갈래로 나뉘어 있지만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 길.


수 천 년 동안 고수해 온 사람들.


사라지지 않고 남겨진 알베르게.

낯선 사람과 나누는 마음.

침대 아래층을 양보하는 배려.


그래서,

이 길은 클래식이다.


빠르지 않아도 되고, 정확하지 않아도 된다.

잘 몰라도 괜찮은 방식으로,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걷고 있다.


다시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아마도 이 길은, 클래식한 방식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클래식하다.

하지만, 촌스럽지 않은 것.


그 길 위에서 만난 클래식한 사람들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완성된 하나의 클래식이다.


클래식한 사람들의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