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그냥 걸었어.
거리 : 19.2km
시간 : 07시 30분 - 13시
도시 : 아르주아 - 페드로우소
Arzua - Pedrouzo
어젯밤에 잠을 설쳤는데, 이른 아침 눈을 뜨는 게 어렵지 않았다.
끝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큰 창가 옆 침대 자리가 너무 포근하고 마음에 들어, 일찍 잠들기 싫었다. 누워서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잘 시간을 놓쳐버렸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별로 중요치 않았던 일들이 궁금해졌다.
'내가 살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걸까?'
'하지만, 역시 바깥세상과 단절된 이 소중한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상반된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동시에 맴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사람들이 코 고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고, 큰 창가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신경 쓰여 뒤척이다가, 처음으로 자정이 지나고 잠에 들었다. 밤이 되면 나도 모르게 골아떨어졌는데, 이제 이 걷기가 익숙해진 것인지, 체력이 좋아진 것인지, 약간의 의문을 남긴 채 잠이 들었다.
아침엔 사람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세운다. 일찍 출발하면 일찍 쉴 수 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씻을 것, 바를 것, 갈아입을 것을 챙겨 화장실로 간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을 곳이 마땅치 않아 침대로 돌아와 몰래 갈아입기 신공을 펼친다.
오늘 걷는 길은 20km가 되지 않는다. 오랜만에 배낭을 메고 간다. 오랜만에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에 놀랐지만, 한참을 가다 보니 무게가 금세 익숙해진다.
남은 길이 아쉬워서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천천히 걷기로 한다.
순례길 첫날처럼 오늘도 마땅히 쉴 곳이 없다. 도로 턱에 앉아서 물을 마시고 쉬어간다.
오늘이 순례길의 마지막 밤이다. 삼일을 걷고 몸이 아팠을 때 이곳에 왜 왔나 싶었는데, 속수무책으로 줄어드는 거리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느려지고 억지로 쉴 이유를 찾게 된다.
오늘은 데보라와 그녀의 친구를 만났다. 데보라는 계속 걸었지만, 친구는 버스를 타고 다니기도 해서, 그녀는 혼자일 때가 많았다.
만나면 기가 쏙 빨리지만 맘 좋은 한국 사람들, 같이 걷고, 같이 챙겨줬다. 이곳에서 헤어지고 만남이 지속되지 않아도, 쉽게 잊히진 않을 것 같다.
길가에서 쉬고 있는데, 풍경과 우리가 너무 잘 어울린다며 사진을 찍어주고 간 순례자부터, 오늘 주방에서 조리 도구가 있는지 뒤지는 우리를 보고 'Nothing'이라며 양손을 들어 올리는 백발의 할아버지. 그리고 산티아고 길이 무려 여섯 번째라는 브라질 할머니, 그리고 한방에서 우리와 하룻밤을 보냈었던 계속 주무시던 할머니, 빼빼 마른 할아버지, 그리고 민트색 자전거를 끌고 다니신 아저씨, 한국인들 사이에서 눈을 멀뚱 거리며 우릴 쳐다본 팬티만 입고 자는 아저씨, 그리고 JH언니의 이상형 조지, 그리고 SI의 베프 청년, 파라스 데 레이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우리 사진을 찍어준 두 명의 여자 순례자.
이 모두가 오늘 밤 우리의 룸에이트다.
스쳐 간 사람들과 또 앞으로 스쳐 갈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가 친구와 나의 영원한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희미해지고 왜곡되겠지만 가능한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언젠가 나이가 더 들어 산티아고 순례길에 다시 오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과 많이 다를까? 이런 생각이 드니, 그들의 이야기를 더 깊이 듣지 못했던 것이 아쉬워졌다. 언어가 조금만 더 통했다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순례길을 걸었으니, 그것만으로 됐다.
나에겐 시간이 지나도 이상하게 계속 떠오를 길일 것 같다.
마지막이지만 마지막이 아니길..
어쩌면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다...
이곳에서 어떤 것을 얻어가는지,
무엇 때문에 왔는지,
답은 찾지 못했지만,
그냥 걸은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날도, 계속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