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녜 Feb 03. 2020

욕실 슬리퍼가 귀여워 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아침에 일어나면 슬리퍼가 보고 싶어 욕실로 뛰어 간다


집에 생수가 떨어졌다. 한참 더웠던 7월, 하루라도 물이 없으면 말라 죽겠다는 생각에 급하게 쿠팡 앱을 켰다. 로켓배송을 시키자니 최소 금액인 19900원에는 한참 모자랐다. 급한 대로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넣다가, 마침 귀엽게 생긴 슬리퍼가 있길래 충동적으로 담았다. 평소에 욕실 슬리퍼를 고를 때는 무조건 가격만 봤는데, 디자인을 고려한 건 처음이었다. 


이 친구는 좀 웃기게 생겼다. 이름부터 ‘주둥이 욕실화’. 말 그대로 두툼한 입술과 튀어나올 것 같은 눈이 인상적이다. 바닥에 곰팡이가 슨 이전 욕실화를 버리고 주둥이(요새는 이렇게 부른다)를 욕실 바닥에 놓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평소 잠들기 직전까지 씻는 것을 미루는 내가, 주둥이를 신어보고 싶어 급하게 온수를 틀었다. 잠이 덜 깨 기분이 좋을 리 없는 평일 아침에도, 아무 생각 없이 양치하러 들어갔다가도 웃음이 난다. 아, 욕실 슬리퍼 하나로 아침마다 기분이 좋다니. 


친구도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주둥이를 보곤 박장대소했다. 자기가 본 슬리퍼 중에 가장 귀엽단다. 둘 다 주둥이 얘기로 한참을 웃었다. 나뿐만 아니라 집에 놀러 오는 사람들도 주둥이 덕분에 즐거워한다.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 ‘작은 소품 하나하나 귀엽고 예쁜 걸로 채워야지’라는 로망이 있었다. 물론 그 로망은 시작도 못 하고 깨지게 되었지만. 팍팍한 지갑 사정 탓에 물건을 고를 때 취향보다는 가격을 우선시해야 했다. 덕분에 집에 들여 놓은 생필품들은 예외 없이 최저가였다(물론 카페에서는 5000원짜리 음료를 생각 없이 사 먹지만 생필품을 살 때는 괜히 100원이라도 더 싼 것을 찾게 된다). 


하지만 주둥이를 사고 나서부터는, 매일 눈에 닿는 물건들을 하나씩 바꿔보려하는 중이다. 매일 해야 하지만 하기 싫은 일들. 양치, 세수, 설거지, 샤워 등등, 이 지루한 일상들이 소소한 물건 하나로 즐거워진다면 정말 큰 변화가 아닐까. 하나 확실한 건, 자기 전의 맥주보다는 화장실의 주둥이가 기분을 더 즐겁게 만들어준다는 거. 

개강 날 과제를 던져주는 교수님 얼굴에 주둥이를 넣어본다. 주둥이가 나에게 과제를 준다 생각하면 좀… 나은 것도 같다. 그러니 여러분 캔 맥주 대신에 주둥이 사세요! 


주둥이 욕실화, 3960원



*대학내일 862호-주간 가심비에 게재되었던 본인글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