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아래 위기의 가족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살아남은 가족의 이야기

아버지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식인 우리마저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었다. 반면 엄마는 사랑이 많고 여린 사람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난 건 비극이었다. 아버지는 늘 밖으로 나돌았다. 따뜻한 저녁 식사를 다정하게 나누는 일이란 우리 집에선 없었다. 식탁 위는 늘 살얼음판 같았고 우리는 아버지의 기분을 살폈다. 아버지가 기분이 좋지 않은데 우리가 즐거워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기분이 좋은데 우리가 죽상을 하고 있어서도 안 됐다. 우리의 기분은 아버지의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 됐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기분을 고려하거나 마음을 나누는 일에는 매우 서툰 사람이었다. 엄마가 결혼 후 처음 맞은 생일에 그는 거나하게 취해 들어왔다. 무심하게 던진 비닐봉지를 받으며 따뜻한 군고구마라도 들어있으려나 기대하고 열어 보니, 아빠의 헌 신발이 들어있더란다. 자신의 신발을 사고 헌 신발을 넣어 온 것이다. 엄마는 그런 사람과 결혼했다. 결혼한 지 3일 만에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지만 속 깊고 책임감 강한 첫째 딸은 차마 부모님께 말할 수 없어 이 생각을 속으로 집어삼켰다.






나는 눈치가 기막히게 빨랐다. 아니, 살려면 별 수 없이 눈치를 봐야 했다. 막내라 더 영악하게 눈치를 살폈다. 어리숙한 오빠가 예측이 힘든 아버지의 기분을 맞추지 못해 혼이 나면 나는 아버지에게 가서 애교를 피우며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 애를 썼다.


아버지가 집에 없는 저녁, 오빠와 나, 특히 엄마는 초조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면 우리는 물건이 제자리에 있는지, 지저분하거나 먼지가 쌓여 있는 곳은 없는지 살폈다.

그의 기분이 좋을 땐 늘 취해 있었다.


'휴, 오늘은 기분이 좋은 것 같다.'


취해 있어 영문도 모르는 짜증을 받지 않아도 되니 다행인 한편, 그의 괴상한 술주정이 시작될지 몰라 또다시 눈치를 살펴야 했다. 어떨 땐 밥을 먹자며 앉혀 놓고 이해도 되지 않는 말을 몇 시간이고 떠들기도 했고, 어떨 땐 "차렷, 열중 쉬어'를 그의 마음에 들 때까지 해야 하기도 했다.


어린 나는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키득키득 웃으며 그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버지가 우리 집에 놀러 온 사촌 동생에게까지 '차렷, 열중 쉬어'를 시켰다는 걸 알게 됐을 땐 정말 수치스럽기도 했지만.


엄마아빠가 안방에서 싸울 때면 방문을 잠그고 귀를 막았다. 빨리 끝나라, 제발 끝나라 주문을 외웠다.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아빠가 엄마를 때릴까 봐 손이 떨렸다. 자려고 침대에 누워서도 내 귀는 안방을 향해 있었다. 모질게 서로를 원망하고 소리 지르는 그 긴 밤 내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서로 죽일 듯이 싸우던 밤이 지나가고 아침 식사 자리에서 둘은 말이 없었다. 나는 최대한 빨리 밥을 삼키고 학교로 향했다. 학교는 최고로 신나는 곳이었다. 친구들은 다정했고, 우리는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그리고 집에 가면 다시 숨 막히는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이 모든 경험들은 고스란히 어른이 된 나의 삶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게 비극이었다. 나는 원하지도 않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 엉망이 된 삶을 물려받았으니 할 수만 있다면 나를 다시 뱃속으로 넣으라고 하고 싶었다.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겠다는 대책도 없이 왜 나를 낳은 건가요? 나는 무슨 죄로 이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하냔 말이에요. 악다구니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은 점점 번창했다. 돈을 벌면 벌수록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나는 예체능에서, 오빠는 공부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우리는 엄마의 자랑이자 자부심이 되었다. 이때 즈음부터 기억 속에 아버지가 거의 없다. 이따금 술에 취한 눈. 다시 외출.


아버지가 외출하면 엄마는 우리를 불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줬다. 엄마는 음식 솜씨가 뛰어나서 늘 밥 먹는 시간을 기다렸다. 아버지가 없는 식사 시간은 내게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기쁨이었다. 엄마는 베이커리를 배워 빵을 구워 주기도 하고 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엄마가 안쓰럽다. 엄마는 남편의 부재를 자식에 대한 헌신과 사랑으로 채워 나가고 있었다. 그것만이 엄마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엄마는 뛰어난 음식 솜씨로 평생의 꿈이었던 식당을 개업했다. 당연하게도 식당은 성공을 거뒀고, 식당에 그야말로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우리 집에 가장 돈이 많았던 시절이다.


애석하게도 이때의 아버지는, 감히 표현하건대, 술 주정뱅이였다. 그런 남편과 이혼하지 않고 산 엄마를 인내심이 강하다고 해야 할까, 미련하다고 해야 할까.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된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최악의 남편이었다고 단언하겠다. 아버지는 늘 반쯤 취한 채로 식당에 들어와 금고를 열고 현금을 한 움큼 쥐어 들고나갔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동이 트면 들어왔다.


엄마의 식당이 잘 되면 잘 될수록 아버지의 사업은 실수가 잦아지고, 수익이 떨어졌다. 그래도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아버지는 술에 절어 살았다.


엄마와 아빠의 싸움이 잦아졌다. 결국 엄마는 식당을 포기하기로 했다. 평생의 꿈, 그리고 재능까지 있었던 일을 주정뱅이 남편 때문에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더 이상 식당에서의 수익이 없게 되자, 아버지는 다시 사업에 몰두했다.






티브이에서 유명 코미디언의 뉴스가 연일 난리다. 자주 티브이 프로그램에 나와서 다정한 부부, 공부 잘하는 자녀를 자랑하던 그였다. 뉴스 속 그는 아내를 때리고 있었다.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뉴스를 보며 가슴이 뛰었다. 영상 속에 다정한 부부는 없었다. 때리는 남편과 무방비로 맞는 아내만 있을 뿐.


교회에서 우리는 ‘비둘기 집’ 같은 화목한 가족이었다. 가족 특송 시간이면 앞에 나가 ‘비둘기 집 같이 온유한’으로 시작되는 노래를 불렀다. 거짓말이었다. 우리 가정은 완전히 병들어 있었다. 그걸 누가 알까. 사람들은 비싼 차를 타고 좋은 물건을 쓰는 우리 집을 부러워했다. 나는 더욱 참담한 심정을 느꼈다. 그건 우리 집에 일어난 비극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나는 누구에게도 이 비극을 들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절대로 내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들키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며 밝고 명랑한 체했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오빠는 집을 떠나 먼 곳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혼자 집에 남아 두 사람의 끝도 없는 증오와 경멸, 싸움을 지켜봐야 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집. 나는 집에 들어가기 전이면 심호흡을 했다. 집에 들어가기 전 내 심장은 늘 빠르게 뛰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몸이 이상했다. 말이 어눌해지고 물건을 놓치는 등 실수가 잦았다.


파킨슨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절망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잔뜩 기죽은 모습. 두려움에 떨며 불안한 모습. 그로부터 7년간 아버지는 단주했다.


아버지의 유일한 단주 기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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