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중독으로부터 살아남은 가족의 이야기
이상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는데도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죽음의 코앞까지 갔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울증으로 인한 감각의 마비 때문일까?
미팅 포인트를 잘못 찾은 바람에 한국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었음에도 걱정이 되거나 두렵지 않았다.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될 데로 되라지. 아무도 못 만나면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지 뭐. 그게 뭐 대수인가.
이게 얼마나 이상한 일이냐면 지금의 나는, 원래의 나는, 세상 쫄보도 이런 쫄보가 없을 정도로 너무 미리 걱정하는 것이 병인 사람이다. A의 경우, B의 경우 적어도 4, 5개가 넘는 경우의 수를 대비해서 대처 방법을 생각해 놓는 사람이라 엄마가 그만 좀 하라고 말릴 정도이다.
얼마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많이 돌리는지 초보운전일 때 강변북로에서 사고가 나자마자 정확하게 매뉴얼대로 사고를 처리해서 직원이 초보인데 뭐 이리 빠르게 처리를 잘하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
우울증은 그렇게 사람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죽는 게 뭐 대수인가. 난 어차피 스스로를 죽이려던 사람인 걸. 그게 한국이든 호주이든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멀리서 긴 머리의 한국인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나를 찾으러 온 스텝이었다. 나는 속으로 ‘여기는 날씨가 참 좋다.’라고 생각했다. 그뿐이었다. 그렇게 호주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건 대단한 해방감을 주었다. 나에 대해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으니 제멋대로 살아도 괜찮겠다 싶었다. 정말 자연인의 모습으로 지냈다. 한국인들과 함께 생활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친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이 완전히 바닥을 치면 정말로 아무것도 바랄 것도 아쉬운 것도 없는 채로 다 내려놓는 게 가능해진다. 이제까지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아무 상관 없어지고 나는 그저 쉬고 싶었다. 정말 그 무엇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밥이 어쩌고 숙소가 어쩌고 학교의 교육 커리큘럼과 강사가 어쩌고 저쩌고 불평불만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다 소음으로 들릴 뿐이었다. 내게 정말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살아야 했다. 이곳에서마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로 끝을 의미했으니까.
호주는 자연이 아름답고 여유가 많은 나라이다. 시드니 시내라고 해 봐야 서울에 비할 수 없는 소박한 도시로 유럽풍의 건물과 공원들이 어우러져서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해야만 하는 일, 잘해야 하는 일 같은 건 없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내면이 곪을 대로 곪아있으니 이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나를 치장하고 다녔다. 키가 170이 넘는데 8센티가 가뿐히 넘는 하이힐을 신고 다니고, 비싼 프리미엄 청바지를 종류별로 사 모았다. 그 나이대가 들고 다니기에 과한 명품 백을 모으기도 했다.
초라하고 싶지 않았다. 초라하고 비참한 현실을 부정하고 싶으니 내 외모는 최대한 화려하고 값비싸 보이도록 꾸며야 했다. 그래야 원래의 내 모습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그게 가짜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그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었다. 그걸 잘 알면서도 나는 그런 삶을 스스로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호주에서는 달랐다. 더 이상 잘 보이고 싶은 생각도, 누가 나를 무시할까 봐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었다. 무시할 테면 하라지. 나는 곧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여기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외모는 정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한국 가면 다시 만날 사람들도 아니다. 알게 뭐람. 다 귀찮았다. 그렇게 사는 게 썩 행복하지도 않았다.
시드니로 떠날 때 이민 가방에 가득 넣은 옷들은 입다가 버릴 것들로 디자인도 색도 모두 엉망진창이었다. 일부러 더 그런 옷들만 골라 입고 다녔다.
묘한 쾌감이 생겼다. 더 엉망진창으로 입어야지, 위아래 디자인도 색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들을 막 입고 돌아다녔다. 너무 심하게 자유로웠던지 제발 아침 모임에는 파자마 좀 입고 나오지 말라고 경고를 받기도 했다.
요즘도 가끔 그 당시 사진을 보곤 하는데 정말 어떻게 이런 꼴로 살았나 싶어 웃음이 난다. 전혀 나답지 않았지만 그게 가장 내가 원하던 모습이었다. 아주 과감하게 그간 내려놓지 못했던, 집착에 가까웠던 모든 틀을 벗어버렸다.
자유를 누림과 동시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고작 일주일 정도 같이 머물며 생활하다 그들이 떠나가면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그런 가벼운 관계들이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도 그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보는 나, 어쩌면 진짜의 나일지도 모르는 나에 대해 새로운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해 주는 이야기들은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어쩌면 들었어도 내 귀에 들리지 않았을 말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밝고 쾌활하며 함께 있는 사람도 웃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다. 사랑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내면은 매우 강한 사람이라고도 말해 주었다. 나의 용기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그 말들은 정말 낯설게 들렸다.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나를 이런 식으로 ‘좋게’ 평가해 본 일이 없었다. 나에게 나란 사람은 실패자, 패배자, 뭘 해도 안 되는 사람, 못 하는 사람, 못생기고 가치 없는 그런 존재였다. 너무 낯설었다. 내가 용기 있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니. 밝고 유쾌한 사람이라니. 함께 있으면 행복해지는 사람이라니.
나는 내가 너무 밉고 싫었는데, 그들이 말하는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친해지고 싶은 매력이 넘치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나는 나를 부정했지만 만난 지 얼마 안 된 그들은 내 모습 그대로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엉망진창인 옷을 입고 도수가 높아 최고로 못생겨 보이는 안경을 쓴 나를 말이다.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일까?
궁금해졌다. 어쩌면 마음속 깊은 속에서 제발 그 말이 모두 사실이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을 누렸다. 아무것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사는 이유를 알 필요도 없었다. 그런 것쯤은 몰라도 그만이지, 눈앞에 펼쳐진 저 아름다운 자연이 인생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말하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 숨을 쉬며 나를 옭아매던 알 수 없는 그 무엇들을 하나씩 벗어던지고 마침내 자연 앞에, 삶 앞에 쉼을 누리게 된 것이다.
학교는 호주의 명물, 블루마운틴이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침이면 예배를 마치고 블루마운틴이 한눈에 들어오는 바위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발 밑에는 끝도 없는 숲이 펼쳐져 있고 그 숲이 끝나는 지점에 펼쳐진 편평한 모양의 블루마운틴이 경이로웠다. 하늘은 나를 압도하는 것처럼 웅장했다. 내가 멋진 풍경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곳에서 정말로, 그토록 바라던 자유와 평안을 누렸다. 신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이것이 세상이다. 내가 네게 선물한 세상.
이것을 누리는 것 외에 네게 주어진 의무란 없단다.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인생이구나,라는 정말 이상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면서 순간에 머무르는 법을 배웠다. 이것은 무언가가 ‘완전히’ 비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어긋난 욕망과 바람, 탐욕, 수치심과 열등감, 두려움, 분노까지.. 내 안에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완전히 자리를 비우고 나자 오히려 깊은 평온을 느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수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살았을 땐 인생에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였다. 사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 왜 이렇게 나는 괴롭기만 한 건지, 이런 인생쯤 끝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런데 되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멋대로 살아보자 했더니 인생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삶이 내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비로소 조금씩 힌트를 주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은 철저한 계획 안에서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물결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두둥실 흘러가면 됐다. 그 흐름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물질로부터의 자유, 강박으로부터의 자유, 명예로부터의 자유, 사람으로부터의 자유, 나로부터의 자유. 삶으로부터의 자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삶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나는 살고 싶어졌다. 그것도 아주 행복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