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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를 마친 걸 축하해, 비록 계약은 종료됐지만.

00. 프롤로그

뜨거운 여름이 막 시작되던 어느 날, 운 좋게 평소 해 보고 싶었던 프로젝트에 프리랜서로 참여하게 됐다. 시간 참 빠르기도 하지. 날씨가 쌀쌀해질 무렵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계약 종료 시점도 다가왔다. 보통 프리랜서로 참여했다가 어떤 식으로든 직원 제안을 하는 것이 관례라면 관례인 회사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생긴 것도 그즈음이었다.


중간 관리자가 나를 불러 타이밍이 안 좋다, 고 했다. 회사에 인원 감축 지시가 내려져 근속연수가 오래된 직원들은 모두 해고 절차를 밟고 있다고, 당연히 자리를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게 되었다고 했다. 나중에라도 기회가 되면 다시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매우 의례적이고 예의 바른말을 남긴 채 계약 종료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게 됐다.


직원이 되길 기대하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작년에 운 나쁘게도(이건 정말 나빴다고 밖에는) 연달아 이직 실패, 그것도 지독하게 무능력한데 지독하게 악랄한 상사를 둘씩이나 만난 후 직장에 적지 않은 회의감까지 생긴 터라 더욱 그랬다. 과연 직장으로 돌아가는 게 답일까, 하는 회피성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5년 넘게 근속했던 회사의 상사는 자신의 무능력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나를 볶아댔다. 겨우 팀 이동을 해서 탈출했나 싶더니 이번에는 나의 새 팀장과 마찰로 중간에서 새우등이 터지고 있었다.


무능력의 근본은 썩은 인성인 걸까.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그의 악랄함에 놀랐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같이 사는 게 아닌 자신만 사는 길을 택했다.


뻔뻔하게도 나를 다시 자신의 팀으로 발령 내려한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더 이상 회사에 다닐 이유가 없어졌다. 그간은 그가 회사에서 보기 힘든 선한 인성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팀의 업무 공백을 메꿔 주는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팀원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사람의 본성은 위기에서 진짜를 드러낸다. 아니 드러냈다.


그렇게 정답던 사우들과 헤어지고 이어진 이직 실패.


회사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에서 만난 프로젝트라 나는 단지 일이 재밌어 보이니 일만 하겠다는 생각이었지 입사를 기대하진 않았었다.


인생은 참 얄궂은 것.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회사는 뜻밖에 선하고 유능한 동료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적당히 개인주의이고 적당히 챙겨 주는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누구 하나 뒤쳐지는 이 없이 역량 있는 직원들과 함께 일하니 일할 맛이 났다. 조금은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신은 내가 원하는 걸 쉽게 주지 않는다. 


이번에도, 늘 고용 계약으로 이어지던 프로젝트를 그대로 계약 종료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처음으로, 하필 내가, 타이밍이 참 나쁘게 말이다.


놀랍지도 않아.


하필 내 앞에서 문을 닫아 버린 대학 입시 때부터, 상사복이 지지리도 없던 나, 무엇 하나 쉽게 풀리는 거 없이 늘 죽어라 노력해야 겨우 남들만큼 살 수 있는 나.


입사가 어렵게 되었다는 말에도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직장생활 짬바가 있으니 이상한 기류는 나도 눈치챌 수 있었다. 한숨이 늘어가는 팀원들, 어두운 분위기. 내가 입사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회의 때마다 회사가 어렵다는 이슈가 나왔으니까.


프로젝트가 끝나면 나는 이제 어쩌지.


마지막 회사(두 번째 실패한)에서 퇴사한 이후, 정확히 말하자면 수습 기간 내 계약 종료였지만, 6개월간 정말 푹 쉬었다. 그동안 회사와 직장의 의미, 생계를 이어가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한 생각을 하며 굳이 회사로 돌아가야 할까, 회의적이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한 회사가 우연히 마음에 들었을 뿐, 그 회사가 아니라면 굳이.


그렇다고 더 쉬기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생계는 중요한 일이니까.





이제 또 자연인이 될 텐데 마음이 급해져서 아무 데나 들어가지는 말아야지. 생각이 복잡해지면 지혜로운 슬로건을 되새기고 실천한다. First things first. 지금 먼저 할 일은 힘든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친 나에게 격려와 축하를 보내는 거다. 자, 뭘로 보상해 주면 좋을까.


여행이다.


내가 사랑하는 여행.


코로나 이후에 무려 5년 만이다. 장소는 인도네시아. 나에게는 회복의 땅. 14년 만에 다시, 인도네시아.


그래서 나는 지금.


발리에 있다.


@edery 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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