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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 당신은 내 여행을 망치러 온 구원자

01. again, INDONESIA

어쩌다 보니 두 가지 형태로 글을 연재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 연재 중인 에세이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살아남은 가족의 이야기”에는 나와 인도네시아의 인연이 담겨 있다.


짧게 요약하면, 나의 가정은 부서진 상태였고 나는 아팠고(정신적으로), 정말 나를 죽이기 직전에 호주를 지나 한 달간 여행한 곳이 인도네시아이다. 그래서 나에게 그곳은 회복의 땅이다. 물론 거기서 만난 사람들 덕이 컸지만.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곳.






프로젝트 종료를 한 달 앞둔 시점에 충동적으로(!) 항공권을 예매했다. 나의 우유부단함을 꽉 붙들어 매 줄 “환불 불가” 숙소도 예약했다.


도망갈 곳은 없다. 넌 무조건 가야 해. 그러니 이제부턴 즐길 생각만 해.


일단 질러 놓았으니 다음은 수습.


뭘 할까 뭘 먹을까 어떻게 다닐까 유튜브 검색창에 하루에도 몇 번씩 발리를 써넣었다. 그러는 한편, 획기적인 아이템으로 단숨에 업계 1위에 올라서 눈여겨보던 회사에 공고가 났다. 지원서를 넣어 두기로 했다. 물론 안 되겠지만 그래도 해 봐야지.






2주라는 긴 시간을 머물기로 과감하게 결정하고 나니 아니나 다를까 무모했던 게 아닌가 후회가 슬슬 밀려왔다. 그럴 줄 알고 “환불 불가”로 예약했지. 나는 널 잘 알거든.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팀은 정말 천사들이 모여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따뜻했다. 프로젝트 종료일에 그동안 고생했다며 선물까지 준비해 주어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지 뭐야.


미래는 모르겠고 일단 계획한 여행부터 잘하고 오자 싶었는데 몇 주전에 헤드헌터에게 보낸 이력서에 만나고 싶다는 답변이 왔다. 동시에 업계 1위의 회사에서도 서류전형 합격이라는 소식.


두 개의 면접이라니. 다음 주면 출국인데요?






여행도 준비하면서 면접도 준비하자니 현타가 왔다. 내 인생. 뭐가 이리 예측 가능한 게 없어?


1순위는 업계 1위 회사였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연달아 성공시킨 터라 성장 욕구가 강한 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면접은 나쁘지 않았다. 무조건 합격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면까몰이라지만 나도 십수 년을 직장인으로 산 짬바라는 게 있는데 이 분위기에 안 되는 건 말이 안 되지. 이제 합격 통보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이다. 아니 될 거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결과는 일주일이 넘게 감감무소식이었다. 면접 전형에서 무소식이 희소식일 리는 없고 불합격자에게까지 안내할 생각 없으니 알아서 포기하라는 메시지겠지.


결국 2순위였던 회사의 면접일까지 다가와 버렸다. 말도 안 돼. 결국 이런다고?


아침에 일어나 화장을 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아니, 이 정도로 고생시켰으면 하나 정도는 줄 만도 하건만 또 아니라고요? 또요?


욕이 나오고 분노가 일렁였다.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좀 쉽게 쉽게 가면 안 되나. 망할 놈의 회사는 불합격이면 불합격이라고 알려줄 일이지 정말 회사 놈들의 무신경함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렇게 출국 이틀 전까지 꽉 채워 면접을 봤다. 내 인생은 정말 왜 이모양일까. 내가 제일 경계하는 게 자기 연민인데 이쯤 되니 내가 불쌍하고 억울하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었다.






여행이 코앞인데 정말 가고 싶었던 회사를 눈앞에서 놓쳤다는 사실에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칩거하고 싶었다. 환불불가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다 때려치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2순위 회사에서 실무 합격 소식과 임원 면접 일정 요청이 왔다. 여행 계획을 말하니 그럼 내일 오란다. 여행 전날이다. 웃자 웃어. 웃어야지 별 수 있나.


정말 턱끝까지 몰아붙인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늘에 대고 욕이라도 퍼붓고 싶은 심정으로 겨우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여행에 대한 기대는 0이 되었다.


될 데로 되라지. 정말 엿같다. 인생 정말 엿같다!!!






@KOREAN AIR


도대체 몇 년 만에 공항이람.


공항에 오고 나서야 알게 된 건데, 나 환전도 전혀 안 했더라? 뭐 이런 여행이 다 있지.


부랴부랴 출금해서 딱 30만 원어치만 환전했다.


그래도 J가 흐르는 피 덕에 비자, 세금 신고서, 트래블 월렛, 픽업 서비스, 유심까지 미리 해 둔 것이 다행이었다. 지금은 무엇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극적이라고 해야 할까, 마지막까지 꼭 이래야만 했냐고 물어야 할까. 2순위 회사와 마지막까지 연봉 협상으로 핑퐁을 거듭한 끝에(네.. 공항에 앉아서 그랬어요..) 회사도 나도 동의한 연봉으로 입사가 결정됐다. 비행기에 타기 1시간 전이었다.



신, 당신은 이쯤 되면
내 여행을 망치러 온 무언가가 아닙니까.



과감하게 지른 여행 경비를 다시 벌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일 수 있다. 내 앞으로 날아오는 온갖 고지서를 무사히 낼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도 다행인 일일 거다. 그런데 하나도 안 기쁜 건 왜일까.


조금 허탈한 심정으로 비행기를 탔더니, 발리에 데려다줬다.


별안간 발리. 그렇게 나는 지금 발리.


@발리의 첫인상, KLOOK 기사님 기다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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