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논 뷰 보려거든 경상도 가면 되잖아

03. UBUD_day2

내가 발리에, 그것도 우붓에서 10일을 보낼 거라고 하니 뭐든 심드렁해 보였던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


“논 보러 굳이 발리까지 간다고? 나는 고향이 경상도 시골이라 집 근처에 다 논밭이야. 그러니 발리 안 가도 돼.”


나로서는 그 말의 의도가 가늠조차 안 됐다. 곧 발리로 여행 갈 계획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저런 맥 빠지는 소리를 굳이나 하는 이유가 뭘까? 저 말이 꽤나 멍청하고 못되게 들린다는 걸 알기는 할까?


여행을 가고 싶지만 못 가는 처지를 합리화하려는 일종의 자기 암시인 건지, 네가 여행 간다고 들뜬 꼴은 죽어도 못 보겠다는 가스라이팅인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진심으로 해외 유명한 그 어디보다 경상도의 논이 낫다고 생각하는 건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그냥 미소인지 무표정인지 모를 어중간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


그럼 당신은 그냥 경상도 논 뷰 보세요.
저는 우붓에 갑니다.


@이걸 보고도 고작 논 뷰,라고 한다면 당신은 참 딱한 염세주의자군요.





나이를 먹을수록(나이 타령해서 미안하지만) 점점 새로운 것도 흥미로운 것도 사라져 간다. 아니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본다. 뭘 해도 심드렁한 사람들.


오래전 직장에서 만난 K 과장이 그랬다. 그녀는 뭘 먹어도 절대 “나쁘지 않네. “ 이상의 칭찬을 하는 법이 없었다. 무얼 하든 최상급의 표현은 고작 “나쁘지 않네.”일 뿐 그녀의

삶은 강아지를 빼면 취미도 관심사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에게 경상도 논 뷰 타령을 하던 그 동료도 그랬다. 뭘 하든 “괜찮네요.” 이상의 표현은 하지 않았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을 더 겪은 후에 나는 그것이 경미한 우울증의 일부임을 알게 되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당시에 내가 표현한 세상은 회색이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어중간한 색.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무덤덤한 감정.


우울증에 걸리면 감정이 무뎌지고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진다. 의외로 슬프다거나, 우울한 기분이 아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에 무감각해진달까. 만약 이런 증상이 오래된다면 상담을 받는 것이 좋다. 놀랍게도 건강한 사람들의 감정은 매우 active 하니까 말이다.


맛있는 걸 맛있다고 느끼고 재밌는 걸 보고 깔깔 웃는 건 유치하거나 유아적인 게 아니라 살아 숨 쉰다는 증거이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 숨 쉬는 감정을 느끼는 것. 반짝이는 감정을 자꾸 되살려야 인생이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인생에 자꾸 무뎌질 때마다 나는 이 사실을 기억하려 한다.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과감히 시도해 봐야지. 언젠가 호기심의 불씨가 모두 꺼져 버릴 때가 올 테니 말이다.


Man is not made to understand life,
but to live it.





둘째 날은 아침 일찍 서둘러 나섰다. 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논 뷰가 기가 막힌 카페에 갈 거거든.


@edery cafe
@edery cafe
@가슴이 탁 트이는 풍경
@아이스 라테 맛있다


04. tips for traveling in bali
*지점명: edery cafe
*총평: 시내가 조금 질릴 때 즈음 가면 좋습니다. 논 뷰 질리게 볼 수 있어요. 다만 위생은 흐린 눈 할 것. 팬케익과 아이스 라테 주문. 아이스 라테는 발리에서 마신 라테 중 손에 꼽게 맛있음. 팬케익 쏘쏘.
음식을 먹기엔 벌레가 매우 많음. 매우 매우. 야외 테이블도 있는데, 나갔다가 수만 마리의 개미떼를 보고 식욕이 사라지는 마법. 희한하게 생긴 도마뱀이 돌아다님.(작고 해치지 않아요.)
음식보다는 경치가 중요한 여행객에게 추천. 정말 시골이에요. 여기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클라우드 나인 가서 한식 먹는 코스 좋음.
*추천 지수: 3점(5점 만점)


아침 일찍 출발했더니 카페엔 나 혼자였다. 자리를 잡고 앉아 글을 쓴다. 바닥에는 도마뱀이 다니고 후덥지근한 날씨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데 그래도 좋은 건 뭐지.


14년 전에 나는 어떻게 이곳에 한 달이나 있었던 걸까. 그때의 내가 그립다.


발리는 인도네시아 본토와 조금 다른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비슷한 점이 많아서 과거를 자주 떠올린다. 나를 아껴주던 인도네시아 친구들.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을 보며 함께 부르던 노래. 뭐든 up to you.라고 말하던 베키.


그때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베키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매우 용감한 사람이다.” 라며 용감하고 지혜롭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서 뭘 본 걸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 때문에 분노하던 나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를 용서해야만 해.
너도 신으로부터 거저 용서받았잖아.
네가 거저 받은 용서를 그에게도 베풀어야지.


그 말을 하는 베키가 야속했다.


“하지만 나는 그와 달라요! 나는 누구도 해치지 않았다고요. 그는 규칙을 어겼어요.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었다고요!”


그러나 나는 곧 그가 옳다는 걸 알았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던 사람을 용서한 후에 나는 더 이상 괴롭지 않았으니까.


진정한 용서는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 음식은 대체로 느끼했다. 속이 니글거려서 점심은 근처의 한식당에 가기로 했다. 무조건 참치 김치찌개 먹어야지. 여행 와서 촌스럽게 한식 찾는 사람 누군가 했더니 여기 있네.


@클라우드 나인 우붓 펍 앤 코 Cloud Nine Ubud Pub and Co
@클라우드 나인 우붓 펍 앤 코 Cloud Nine Ubud Pub and Co
@클라우드 나인 우붓 펍 앤 코 Cloud Nine Ubud Pub and Co
@삼겹살 150g, 공기밥 포함 찌개랑 시켰더니 양 딱 좋아요
@고향의 맛 김치찌개 with 참치
05. tip for traveling in bali
*지점명: 클라우드 나인 우붓 펍 앤 코 Cloud Nine Ubud Pub and Co
*총평: 일단 김치찌개를 판다는 점에서 추천 지수가 심하게 올라간다. 여기서 한국 식당과의 비교는 정말 의미 없는 일이고 이 정도로 구현해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식당. 삼겹살 쏘쏘, 김치찌개 훌륭함. 분위기는 한식 식당이라기보다는 펍에 가깝다. 위치가 좀 애매한 게 아쉬움.
*추천 지수: 5점(5점 만점)


클라우드 나인 우붓 펍 앤 코 Cloud Nine Ubud Pub and Co는 우붓에 다녀온 지인이 강추했던 곳이다. 해외에서까지 한식이라니 갈 일 있겠나 했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저녁엔 한식 먹어야겠다 싶은 걸 보니 인도네시아 음식이 입에 안 맞는 모양이다.


음식은 훌륭했다. 아니,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간이 어떻고 물이 어떻고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구글에는 다들 셰프들만 리뷰 남기나요? 요리 분석, 냉철한 평가 멈춰.)






든든하게 식사를 마치고 나니 2시를 막 지나가고 있었다. 벌써 들어가긴 좀 아쉽고 내일 렘푸양 사원에 가려던 계획은 파투 났으니 우붓의 하이라이트! 요가반에 가기로 했다. 아 정말 두근거린단 말이야.


@FINALLY!!
@쉿!
@reception
@요가의 코어 메시지 LOVE
@발리 여행의 정체성은 이 사진이 말해주는 듯 calm & lazy


드디어 요가반. 나도 요가반. 내가 드디어 요가반에 왔다!


리셉션에서 회원 등록하고 가장 가까운 시간대의 클래스를 문의하니 30분 전에 오란다. 그때까지 뭐 한담.


요가반은 곳곳에 방갈로 같은 쉼터가 있는데 아무 데나 올라가서 쉴 수 있다. 나는 제법 넓은 공간을 혼자 쓰고 있는 분께 양해를 구하고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주르륵. 흐르는 땀에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반가웠다.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의 요가반


우연히 참석한 것치곤 정말 만족스러운 수업이었다. 사실 스트레칭에 가까웠지만 요가 선생님의 영적인 메시지가 좋았다. 클래스가 끝날 때 그녀는 직접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 주었는데 이것 또한 이국적이고 오묘했다. 영적인 기운을 불러와 주는 듯한 느낌.


수업 시작 전에 타로 카드를 하나씩 뽑아 메시지의 해설이 담긴 책도 돌아가면서 읽었다.


나의 메시지는 EVOLUTION.


EVOLUTION
earth changes, climate change, transformation


신기했다. 14년 전에도 transformation이라는 키워드를 만난 적이 있다. 인도네시아에서였다.






당시에 나는 인도네시아의 기숙사에 머물렀는데 우리 앞 타임 클래스의 키워드가 transformation이었다. 우연히

만난 그 단어가 너무 좋아서, 한동안 마음에 품고 다녔다.


그때 나는 변화가 간절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이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겠다 다짐했을 때 마치 하늘의 게시처럼 만난 단어.


지금의 나는 또 한 번의 변화를 앞에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신적으로 많이 회복됐다 해도 성장은 늘 필요했고 여전히 내가 성장하고 있느냐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울 테니까.


이만 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의 성격적 결함, 모난 자아가 날뛰게 될 것이었다.






명상에 가까운 선데이 요가 클래스를 마치고 조금 걸어 나오니 첫날 갔던 피손 카페가 나왔다. 이렇게 자주 오게 될 줄은 몰랐지 피손.


근처에 맛집이 있다는 걸 봐 둔 터라 저녁을 먹으러 이동했다.


@MEGUNA at monkey forest
@MEGUNA at monkey forest
@가지 튀김과 시그니처 누들
06. tip for traveling in bali
*지점명: 메구나 Meguna Ubud Restaurant
*총평: 이때쯤 이미 인도네시아 음식이 안 맞기 시작한 터라 반쯤 걸러서 들으세요. 가지 튀김 추천. 누들 쏘쏘. 가지 튀김이 먹을만했던 이유는 토마토케첩을 듬뿍 찍어 먹었기 때문이 아닐까. 몽키 포레스트 근처에서 가볍고 저렴한 한 끼로 추천합니다. 너무 큰 기대는 마시길.
*추천 지수: 2.5점(5점)


메뉴를 잘 모르겠을 땐 구글 사진을 보여 주면 된다. 그리하여 먹게 된 가지 튀김과 시그니처 누들.


매장은 옷가게와 식사,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식당 겸 카페를 같이 운영하는, 매우 특이한 형태였다. 밤이 가까워 오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혼자 여행 중이니 안전은 늘 최우선 사항이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고젝 바이크를 타고 귀가했다. 이렇게 여행의 두 번째 날이 지나간다. 벌써 아쉬운 건 왜람.

매거진의 이전글 면접, 당신은 내 여행을 망치러 온 구원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