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UBUD_day 1
이왕 이렇게 된 거 여행이라도 망치지 않으려면, 방법은 빨리 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1순위였던 회사는 결과 미통보로 잠정적 불합격이니 재끼고, 2순위였던 회사는 조금 깎이긴 했어도 희망 연봉에 근접하게 협상했다.
재빠르게 입사통지서까지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미래만 생각하겠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거나 아쉬워해 봐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지금 발리에 있는 걸. 지금 이 순간을 누리지 않으면 한국에 돌아가서 후회하게 될 거야. 그러니 Let Go and Let God.
발리에 도착하니 이른 새벽이다. 연착된 탓이었다. 혼자 왔고 초행길(?) 임에도 무덤덤했다. 그냥 클룩에 예약해 둔 픽업 기사가 약속한 시간이 지났다며 예약을 취소하지 않았길 바랄 뿐.
나는 에라 모르겠다가 잘 안 되는 성격이다. 에라 모르겠다라니 무슨 그런 무책임한 말이 다 있어. 그런데 최근에 크고 작은 예측불가능한 일들을 겪고 나니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더 이상의 계획이 무의미하다는 뜻이구나.
인생의 큰 그림은 그리되 세세한 발걸음은 그때 내게 주어진 대로 따라가라는 뜻이구나.
그럼 오늘 내게 주어진 것은 발리 무사 입국.
조금 어리바리하긴 했지만 매우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입국 절차를 마쳤다.
이국적인 발리의 첫인상. 14년 전의 인도네시아 생각이 났다.
지나고 나서 말인데 내가 운이 없다는 건 순전히 불운한 상황에 과몰입했기 때문에 생긴 착각이다. 나의 여행은 시작부터 운이 좋았으니까.
새벽에 우붓까지 한 시간 남짓한 이동 내내 기사님과 수다를 떨었다. 매우 친절하고 따뜻한 기사님은 인도네시아 친구들을 생각나게 했다.
나에게 영어를 잘한다고 칭찬해 주어 한국에 가면 영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노라 다짐도 했다. 이 다짐만 126만 번째가 되겠지만.(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새벽 도착이라 불안할 나를 위해 숙소까지 짐을 옮겨 주고 내가 무사히 체크인했는지 확인까지 해 주었다. 그는 나에게 정해진 비용 이외에 받은 것이 없는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 준 걸까.
이래도 내가 운이 없어?
01. tip for traveling in bali
*숙소_우마유리 인
*총평_가성비 숙소. 아고라에서 3만 원대에 예약. 우붓 시내와 떨어져 있어서 조용하게 머물 수 있다는 점이 장점, 시내에 걸어가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는 점이 단점.
숙소 내에 생활용품은 생수 2개 외엔 아무것도 없다고 보는 게 좋습니다. 수건도 챙겨 오는 것을 추천합니다. 짧은 여행객보다는 길게 머무는 여행객이 잠만 자는 용도로 추천. 유명 스파인 putri spa 2, 3호점 모두 도보로 5분 거리에 있고 근처 편의점도 5분 거리에 있습니다. 숙소 바로 앞에 세탁소가 있어서 좋습니다. 되도록 고층으로 예약할 것.
*추천 지수_2.5(5점 만점)
뭘 할까 고민하다가 주변을 좀 돌아볼 겸 걸어서 시내까지 나가 보기로 했다. 이것이 매우 어리석은 판단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어딜 갈지 계획이라곤 없이 구글 앱에 마구잡이로 저장만 해 두고 떠나온 터였다. 첫날이니 누구나 가는 곳에 가 봐야지.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거리에 나오니 훅, 하고 열기가 느껴졌다. 내가 발리에 있다니. 다시 인도네시아에 왔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언젠가 인도네시아에 다시 오리라 막연한 다짐은 있었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인도네시아를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몰래 훌쩍거렸을 만큼 나는 이땅이 좋았다.
그렇게 14년에 흘렀다. 그때의 나는 불행했고 죽음을 생각했다. 그런 나를 살린 건 사람들이었다. 호주에서 만났던 사람들, 인도네시아와 태국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나에게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허영심이 많고 자존감이 낮았다. 염세적인 삶의 태도는 좋은 사람들을 떠나가게 만들었다. 내 주변엔 나랑 비슷한 사람들만 남았다.
그런 내게 인도네시아 친구들은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아마도 신이 그들을 통해 말씀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건 아마도 사랑. 삶을 향한 사랑. 좋은 사람들을 향한 사랑. 그리고 마침내 그 사랑이 나를 향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넌 아직 죽을 때가 아니야.
진짜는 하나도 못 겪어 봤잖아.
내가 네게 선물한 삶은 그런 게 아니란다.
이제 진짜 삶을 살아 보지 않으련?
하염없이 걷다 보니 꼭 가야겠다고 다짐한 티켓 투더문_TICKET TO THE MOON 매장이 보였다. 오호! 이제 시내로 진입했나 본데.
생각보다 매장은 작았고 마침(?) 전기까지 나가 있어서 더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유튜브에서 하도 많이 봐서 사려고 마음 먹었던 가방을 바로 찾아 계산했다. 쇼핑할 땐 누구보다 총명하기도 하지. 귀여운 녀석.
이왕 쇼핑을 시작했으니 오가닉 허브 제품으로 유명하다는 angelo store에도 들러 보기로 했다. 아, 내 발에서 불나는 소리.
저기, 그런데 장사 안 하세요?
기껏 찾아갔더니만 매장은 거의 점포 정리 수준으로 텅텅 비어 있었다. 나는 비누며, 아로마 오일 그런 건 관심 없고 오직 모스키토 퇴치용 스프레이를 사고 싶단 말이다!(응, 없어.)
슬슬 다리가 욱신거리고 강렬한 태양으로 인해 햇빛 알레르기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실내로 가야겠다. 알레르기가 올라오면 정말 여행을 모두 망칠 테니까.
피손 매장이 우붓에도 있는 줄 모르고 스미냑에서 갈까 생각 중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피손 우붓점. 가야지. 암, 핫플레이스 못 놓쳐.
02. tip for traveling in bali
*지점명: PISON at ubud
*총평: 봉골레 비추. 롱블랙 쏘쏘, 여기보다 좋은 곳 엄청 많아요. 지나가다 들르는 건 몰라도 굳이 찾아올 곳은 아님. 바로 옆에 코코마트 있으니 코코마트 오는 길에 커피 한잔 하긴 괜찮아요. 기대를 많이 내려 놓으시길.
*추천 지수: 2점(5점 만점)
- 이상 굳이 찾아간 자의 조언 -
피손 을지로점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한국인이 많다던데 나에겐 핫플을 즐기는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 다름아닌 남들보다 빨리 먹는 것.
11시도 안 된 시간에 도착했더니 한국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자리도 제법 널널했다. 럭키!
그렇게 발리에서의 첫끼는 봉골레 파스타와 아이스 롱블랙. 나시고랭으로 첫끼를 시작하지 않는 예측 불가능한 여행! 이것이 진정한 여행자의 삶이지.(실은 출국 하루 전까지 면접 보느라 여행 때려치우고 싶었던 여행자)
결과적으로 첫날에만 우붓 시내를 다섯 바퀴는 돈 것 같다. 나중엔 정말 쓰러지지 않을까 싶어 스타벅스에 가 버렸다. 해외까지 와서 고작 스타벅스에 갔다 이말이다.
욱신거리는 발을 주무르며 앉아 있자니 뜻밖에 관광 명소라는 곳이 보였다. 오호. 나는 이렇게 시원한 스타벅스에 앉아서 입장료도 안 내고 저들이 체험하는 기복 행사를 구경한단 말이지? 오트밀크로 바꾼 시원한 아이스 라테를 마시면서? 하필 명당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가 8282의 민족 한국인이 나가자마자 그 자리를 독차지하고?
이래도 내가 운이 없어?
발리에 가면 사야 한다는 쇼핑 리스트는 첫날 모두 해치워 버렸다. 딱히 계획이 없었으니 시내나 구경하자는 게 그만 쇼핑데이로 변질되어 버렸달까.
그중에서 DEUS라는 발리 브랜드의 티셔츠는 3만 원대로 저렴하고 질도 괜찮아서 욕심이 났다. 두 개를 집었다가 결국엔 하나만 결제. 몇 달 동안 소속이 없는 프리랜서로서의 삶이 만들어 준 절제력이다.
이때까지 한 번도 소속이란 게 없어 본 일이 없는 파워 J형인 나는 근래의 나의 정체성에 매우 혼란했다.
따박따박 고정 급여를 주는 회사를 떠난다는 건, 단순히 나에게 못 돼먹은 짓을 하는 팀장에게 엿먹이는 것 이상으로 나도 엿을 먹게 된다는 걸 의미하는 줄 미처 몰랐던 까닭이다.
소속 없는 성인은 당연하게도 금전적인 책임을 홀로 져야 한다. 나는 나라가 나에게 그렇게나 많은 책임을 지우고 있는지 몰랐다. 자동차는 왜 샀는지 성가신 데다가 돈까지 잡아먹는 기계가 된 지 오래고 건강 보험이며 각종 고지서는 또 왜 이리 자주 온단 말인가.
갑자기 아버지가 서재에 앉아 고지서를 정리하며 고심하던 모습이 이해가 됐다. 그가 경제적 책임을 다 한 것만으로도 그를 마음껏 원망하긴 어렵게 되었다. 이제야 그 무게를 조금이나마 알겠으니까.
고작 내 한 몸 먹여 살리는데도, 물론 좋은 걸 먹이고 입히고 있긴 하다만, 이렇게 버거운데 셋이나 딸린 식구들이 가끔은 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이따금씩 후회하는 듯했지만 그만하면 최선을 다 한 것이 맞을 것이다. 어른이 되니 부모를 이해하는 폭이 커지는 것 같다. 그러니 어른인가. 타인의 삶도 그러려니 하게 되었으니.
첫끼를 어이없게 양식으로 날려 버렸으니 저녁은 핫플에서. 4시 조금 넘어 도착했더니 역시나 대기 없이 바로 입장했다.
혼자 여행은 단점이랄 게 거의 없는데 몇 개 꼽아 보자면, 숙박비를 혼자 다 내야 하기 때문에 등급이 몇 개 내려갈 수 있다는 점과 여러 가지 음식을 즐길 수 없다는 점 등이 있겠다.
사테도 궁금하고 BBQ도 궁금했지만 별 수 없이 하나만 선택해 빈땅과 먹었다.
03. tip for traveling in bali
*지점명: 와룽 마칸 부 루스
*총평: 왜 맛집이죠?
*추천 지수: 2점(5점 만점)
그렇게 기진맥진하여 첫날 여행은 종료.
우붓 시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대략적인 감을 잡았으니 내일부터는 계획을 좀 해 봐야겠다. 물론 침대에 눕자마자 나머지는 기억에 없다. 여행이 그런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