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계류유산 판정을 받고 월요일로 수술을 잡았기 때문에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하루 더 주어졌다.
수술하고 돌아와 든든하게 밥을 챙겨먹어야 하니까 미리 장을 보러 갔다. 그때까지도 입덧이 계속 되어 속이 좋지 않았다. 행사 중이라 이마트에 사람이 정말 많았다. 출산율이 꽤 높은 지역이라 그런가, 아님 내 마음이 그래서일까, 아기들이 특히 많이 보였다. 아기들 얼굴을 면면이 보다 보니 오복이가 태어났으면 어떤 얼굴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치밀어 눈물이 나고 말았다. "오빠, 여기 아기들이 너무 많다.." 장을 보다 말고 남편과 이마트 스타벅스에 앉아 좀 쉬었다.
나는 며칠 간만 더 슬퍼하고 울고 싶다 했다. 지금 충분히 슬퍼해야 나중에 괜찮아질 것 같다고. 그러니까 남편이 말했다.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아무리 많이 슬퍼한다 해도 언젠가 불현듯 생각이 나 슬픔이 밀려올 때가 또 올거라고. 오빠도 너무 슬프고 이런 상황이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슬픔에 잠식되고 싶지 않다 했다.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피하지 않되, 오복이가 다시 건강하게 찾아올 걸 상상하며 앞으로 나아가자고 했다. 그렇게 나도 마음을 추스려 갔다.
남편도 배우자 유산휴가 3일에 하루를 더 붙여 4일을 쉬게 됐다. 오랜만에 남편과 오랫동안 종일을 붙어 있게 됐다. 상태가 괜찮을 때 반찬을 몇 가지 만들어 두었다. 남편은 미역국을 담당했다. 그렇게 냉장고를 두둑하게 채우는 것으로 수술을 대비했다. 수술 전날 밤엔 자는 내내 꿈을 꾸었다. 수술하는 꿈을...
아침 일찍 병원에 도착했고, 다시 한번 수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유전자 검사 신청서에도 싸인을 했다. 유산의 원인이 태아염색체 이상인지 알아보는 검사였다. 어차피 바우처 금액이 많이 남아 있어 안할 이유가 없었다. 아기 염색체에 이상이 없다면 나의 호르몬 또는 면역학적 요인이 그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유산은 반복된다. 물론 의사 선생님은 초기 유산은 특별한 원인 없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검사를 권하지 않았지만 나는 두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습관성 유산 검사도 부탁했다. 그렇게 원인을 알고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고 싶었다.
소파수술은 지하 1층 소수술실에서 진행됐다. 만삭의 임산부들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는데 어쩐지 처량했다. 수술실도 왜 하필 지하 구석에 있는 걸까. 아기를 뱃속에서 온전하게 길러 내지 못한 나는 여기 산부인과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수술은 그리 거창하지도 않았다. 치마만 갈아입으면 돼서 입고 간 맨투맨 밑에 일회용 치마를 입었고 수술 모자를 썼다. 내 꼴이 조금 웃겼다. 침대에 누워 링거를 꽂았다. 잔잔하고 구슬픈 피아노곡이 흘러 나와 눈물이 또 두방울 쯤 흘러 내렸지만 마음은 괜찮았다. 곧 옆에 있는 수술실로 들어갔고 인터넷에서 봤던 것처럼 양손과 양발이 묶였다. 수술 모자를 쓰고 산소호흡기를 착용한 채로 수술실 기계음을 듣고 있자니 조금 무서웠다. 이때까지도 내 마음은 잔잔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간호사 두 분과 적막 속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저희 선생님 기다리는 거예요?" 물었다. 인자하신 간호사 한분이 눈을 맞추고 대답을 해주려는 찰나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바로 마취제가 투여됐으며 "어.. 졸려여..." 하면서 잠이 들었다.
다시 수술실 밖이다. 난 침대에 누워 울고 있다. 옆엔 남편이 내 손을 꼭 잡고 있다.
정신이 몽롱한 채로 배가 아프다며 울었다. 계속 엉엉 울다 조금 정신이 드려고 할 때 커튼을 걷고 간호사가 들어와 옆에 다른 분도 계시니 조금 조용히 해달라고 했다. 오빠는 '아직 마취가 안 깨서 그런 것 같다, 이런 상황 잘 아시지 않냐, 조금만 양해를 부탁드린다' 했다.
집으로 돌아와 들었던 이야기, 나는 마취에 들고 수술이 시작되자 마자 아프다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밖에서 대기하던 남편에게도 모두 들렸는데 무슨 의료사고라도 난 줄 알고 무서웠단다. 수술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울어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조용히 해달라는 간호사에게 오빠는 화가 났단다. 감기 걸려서 오는 곳도 아니고 어떻게 간호사가 그러냐며. 그래도 나는 조금 민망하긴 했다. 정말 무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무의식 중에 그렇게도 아팠나 혹은 너무 슬펐나.
수술이 끝나면 2시간 동안 영양제를 맞는다. 영양제를 맞는 동안 옆 침대에 있던 분이 수술실로 들어갔다. 석션 소리 같은 게 몇 회 들리고 5분도 채 되지 않아 의사 선생님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임신이 종결되는 건 이렇게 순간이구나. 한편 그 짧은 시간동안 난 대체 무슨 난리를 쳤던 걸까. 대기 중이었던 이 분을 두렵게 만들진 않았을까 죄송스러웠다.
그녀가 다시 침대로 돌아왔을 때 커튼 너머로 훌쩍이는 소리가 한참동안 계속 됐다.
수술 이후 나를 힘들게 했던 건 슬픔 그 자체는 아니었다. 살며 내가 겪는 슬픔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동생과 싸워 슬펐던 나는
모의고사를 망쳐버려 슬펐던 나는
남자친구와 헤어져 슬펐던 나는
어느 새 아기를 잃은 엄마가 되어 울고 있다.
태어나 내가 처음 목도한 죽음이다.
지금은 얼굴도 모르는 2cm의 작은 아기지만, 내 평생을 함께한 엄마, 아빠, 그리고 나의 소중한 남편과도 언젠가 이별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하고도 생경한 사실을 비로소 실감했다. 유산 직후 이상하리 만큼 이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가만 있다가도 가족을 잃는 상상이 피어나 자꾸 두려웠다.
이만하면 팔자 좋은 삶이라 자신했던 것도 틀렸다는 걸 알았다. 나에게도 '별일'은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생각하면 답이 없었다.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려고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임신을 알았을 때 난 들뜨지 않았어요. 하나도 당연하게 생각한 적 없어요. 감사했고 겸손했어요. 난 이미 아기의 소중함을 알아요.
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요.
오복이는 성 염색체 중 X염색체 1개가 소실된 염색체 이상이 맞았다. 태어나게 된다면 난소 기능 장애 및 성장 장애가 발병하는 유전 질환인 '터너 증후군'을 앓게 되나, 보통은 이렇게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유산 된다고 했다. 그렇게 오복이가 딸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유산 후 조금 지났을 때 또 꿈을 꿨다.
하얗고 큰 송편을 손에 쥐고 걸어 갔다. 어느 집으로 들어가니 하얀 방에 돌 때 입는 한복을 입은 여자 아기가 있었다. 연두색 한복에 조바위까지 쓰고 반짝 거리는 눈으로 생글생글 웃고 있어서 너무 귀엽다며 안아주었다. 손에 있던 송편도 꼭 쥐어 주었다.
깨고 나서 알았다. 오복이구나.
우리 아기가 태어났으면 맞이했을 수많은 가능성들을 나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저 이렇게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을 거라고 짐작할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