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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May 16. 2023

선인장 그리고 방문객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경험


J가 단체방을 만들어 K와 나를 초대해, 책방 “선인장”을 가자고 했다.


이제 글을 쓰려면 책이랑 친해져야 하니 첫출발이 기념이 될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책방이 강원도 평창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이미 가슴이 뻥 뚫린 기분으로 상쾌하기도 했기에 선뜻 가겠다고 했다.


그래도 강원도 평창에 위치한 책방인데, 출발 전까지 어느 누구도 “가서 또 어디를 들릴지, 뭘 먹을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어느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빡빡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되레 좋았다.


J의 차를 타고 출발한 우리는 행여 여운이 깨질세라 휴게소 한 번 들리지 않고 곧장 책방으로 향하며 단 한 번의 공백도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분명 출발 전에 각자 공유하고 싶은 음악으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오자고 해서 어제 새벽에 밀린 숙제를 하듯 준비했건만, 셋이 만난 그 자리에 음악이 있을 공간이 없었다.


선인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니 책방이 생각보다 더 예뻤다. 흐릴 것 같다고 했던 하늘 위로도 하얗게 피어난 몽글몽글한 구름이 강원도는 역시 뿌연 서울하늘과는 달랐다. 뭐든 달라야만 했다.

들어서니 책방지기님이 반긴다. 어떻게 오셨냐고 묻는 질문에 J가 이 책방을 위해 왔다고, 한겨레에 실린 글을 봤다고 했다. 국화차와 약과를 내어주시는 지기님께 “사장님도 여기 앉으세요”라고 했다. 지기님의 의사는 뒷전이고 내가 좋으면 그만이었다. 지기님이 타로를 봐주셨고, 책을 읽자고 와놓고 타로에 푹 빠졌다. J가 나를 작가라고 소개했고, 지기님은 어떤 책을 쓰셨냐고 물으셔서 작아지고 있는 와중에 브런치 작가라고 했는데도, “나중에 책 나오면 여기서 북토크하세요”라고 흔쾌히 공간을 내어주시는 지기님께 나는 이때 반한 것 같다. 대화는 다양한 가지로 뻗었다. J의 어머님, 나의 신랑 이야기, 지기님의 신랑 이야기, 결혼은 사기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 그리고 책 이야기 등등


정신을 놓고 이야기하다 우린 아침에 먹은 김밥 외에 아무것도 안 먹은 게 생각났고, 그 무렵 지기님이 딸 치과를 가야 한다고 하셨다. 4시간이 흘러있었다. 아뿔싸. 책을 사러 책방에 와놓고 어떤 책을 살지 보지 않았다. 내일 오전에 다시 와서 책을 사겠다고 했다.

11시 오픈 시간에 맞춰 오겠다는 우리에게 지기님이 “10시에 오세요. 그때 열게요”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강원도까지 와서 다른 일정도 있을 거란 생각에 미리 열어주신 게 아닐까 싶은데, 마치 소개팅 후 애프터를 잡는데 상대가 좀 더 일찍 보고 싶다고 하는 이 대단한 호감에 덩달아 설렜다.


새벽 5시가 넘어 겨우 대화를 멈추고 잠들었는데 누구 하나 어려움없이 8시에 일제히 일어났다. 커피를 내려주신다는 지기님께 주전부리를 약속한 터라 빵집에 들러 빵을 사고 책방에 가니 지기님이 이미 커피를 내리고 계셨다.


커피를 마시면서 우린 마음 속 더 깊은 것들을 빼냈다. 지기님의 심경, 지기님의 가족 이야기, J의 가족이야기, K의 가족 및 일 이야기, 우리가 만난 계기 등등.

때론 박장대소했다가, 때론 눈물을 훔쳤다가, 우린 여러 감정을 공유하며, 각자의 인생 안에 녹아들었다.


그러다가 내가 “저희 북클럽 이름이 선인장입니다”했는데 J랑 K가 나를 보며 의아해한다. 내가 어제 이야기를 꺼낼 때 둘 다 별 말 없기에 동의했다 생각했는데, 침묵은 참 어려운 언어다.

“예전 팀장님이 저한테 OOO님은 참 선인장 같아요. 가까이 가면 꼭 가시에 찔린다고 하셨어요. 저희 셋 정도는 달라도 할 말은 하는 친구들이라 저만 선인장 같지 않아서 한 번 지어봤어요”했다. 그리고 물었다. J와 K에게 “북클럽 선인장 별로야?” 그제야 마지못해 동의한다. 그리고 앞에서 웃으시는 지기님께 “저희 선인장 멤버가 4명이에요. 저, J, K 그리고 지기님” 지기님은 선인장 지기님이니 당연히.


10시에 들어가서 우린 3시 30분에 지기님 딸, 세아가 “언제까지 이야기할 거야?”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오늘도 커피랑 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대화에 빠졌다. 지기님이 있다고 우리는 눈치를 보거나, 이 소리를 해도 되나 하는 고민을 하지 않았다. 낯선 이가 낯설지 않았고, 우리 대화의 주제가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넷은 원래 알고 지내던 친구 같았다. 생각해 보니 J와 나, J와 K, K와 나도 둘이서는 만났어도 셋이 한 자리에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꿈을 꾸었다. 아주 좋은 꿈.


그 꿈을 선물해 준 J에게 고맙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내 꿈을 처음 이야기한 이가 J였다. 내 꿈에 힘을 실어주자고 그녀는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책을 부러 찾아 읽어보고 괜찮다 느낀 다음에 나에게 선물했고, 작가라는 꿈에 한 발 더 가까워지라고 이 모임을, 이 여행을 제안했다.

내가 글을 쓰겠다고 하니 온 세상이 내가 가는 길만 비추는구나 생각했는데 J가 옆에서 온 마음으로 내 길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 마음이 고맙다.


우리의 꿈 이야기를 듣다 지기님은 불현듯 어떤 책이 떠오른다고 하시며 각자에게 책을 한 권씩 선물로 주셨다. 그 책을 사겠다고 했지만, 지기님도 누군가에게 받은 책이라서, 아니면 2권이라서 선물하는 거라고 하시곤 웃으셨다. 소박한 시골 책방에서 책만 팔아서는 힘들지 않으시냐고 차도 파시면 좋겠다고 제안하는 J와 K에게, 애써 이 책방을 찾는 분들에게 책이 아닌 차를 팔고 싶지 않다고 하시며 차는 제가 내어 드릴 수 있는 마음이라고 하시는 지기님의 그 나눔이 또 고맙다.


낯선 이모들에게 시간을 쏟는 엄마를 내내 기다려주고도, 이모들 또 와도 되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세아의 그 마음이 고맙다.


올라오는 차 안에서 여행의 느낀 점을 묻는 질문을 나누고 있는데, K가 그랬다. 내가 생각보다 디테일한 사람이었다고. 누군가는 나를 예민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나를 생각이 지나치게 많다고 했는데, 디테일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좋았다. 섬세함과 예민함은 다르니깐, 그 단어를 써준 그녀의 마음이 고맙다.


신랑에게 톡을 보냈다. “내가 신기한 경험을 했어. 뭔가 소개팅을 하고 애프터를 받은 기분. 어제 처음 뵌 분과 이렇게 연결된 느낌이 너무 신기해”라고 그는 알아듣지 못할 톡을. 집에 와서 신랑에게 이 신기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니 그가 그랬다.

이미 알고 있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았을 거라고. 책이라는 매개 앞에, 이미 정서적 공감대가 있는 편안함이 첫눈에 통했을 거라고. 고등학교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전혀 어색하지 않듯이 편안했을 거라고.


방문객이라는 시를 좋아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근사한 표현을 경험했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경험을, 오히려 한 사람과 연결된 그네들의 부모님의 인생도 안고 사는 거대한 인생을 한 번에 내 안에 들였다.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이 시를 좋아한다면 기꺼이 차를 내어주시는 "책방 선인장" 지기님을 만나 뵙기를 조심스레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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