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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May 20. 2023

사투리가 어때서

표준어에 왜 교양을 논해서 무식해지게 만드나  


대학교 1학년 겨울 방학은 광주 집에서 보내다가 개학 즈음 올라왔다. 학교 근처에서 살았던 터라 학과 방을 기웃거렸는데 선배가 소파에 앉아 쉬고 있다가 이윽고 말을 걸어왔다.


선배: OO아, 올라온 지도 꽤 됐는데 너는 언제까지 사투리를 쓸 거니?
나: 글쎄요. 고치려고 하는데 쉽지 않네요;; 더 노력해야죠.
선배: 빨리 고쳐. 너 무식해 보여.
나: (순간 귀를 의심했다) 네? 뭐가 무식해 보여요?
선배: 네 사투리.
나: 오빠. 제가 비속어를 쓴 것도 아닌데, 어느 부분이 무식해 보여요?
선배: 다. 네 억양이 제일.


서울에 오니 전국 각지의 다양한 사투리들이 모여있었고, 그중 서울말 하는 친구들이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나운서나 되어야 그리 말하겠지 했는데 억양 하나 없이 뱉는 말들이 그렇게 깔끔하고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비교군이 있으니 내 사투리가 나도 의식되던 터라 부지런히 사투리를 교정 중이었는데, 저 대화 이후로 나는 사투리를 의식적으로 고치지 않았다. 사투리를 의식적으로 고치는 게 내가 쓰는 사투리를 무식하다고 인정하는 것 같아서. 마치 내가 서울말을 더 피나도록 연습하면 진짜 그렇게 느껴지는 날이 올 것 같아서.


나는 한 번도 광주에 있는 울 엄마가, 울 오빠가, 내 친구들이 쓰는 사투리를 무식하다 생각한 적이 없었다. 표준어의 정의가 곧 ‘교양 있는 사람들이 쓰는 현대 서울말’인걸 배웠건만 한 번도 교양 있는 서울말이 아닌 내가 쓰는 전라도 사투리가 무식하단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은 광주를 떠난 내가 서울말을 배워왔을까 봐 만날 때마다 서울말 좀 해보라고 했다. 못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서울말을 하지 않는 나를 친구들은 여전하다고 좋아했다.


그즈음 나는 성우를 포기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들락거렸던 성우 만들기 카페에 그 대화 이후로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이를 악물로 고쳐서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 범주에 들고 싶지 않아 졌고, 누군가의 사투리를 무식하다고 평가하는 교양으로 정의되는 그 말을 더 이상 흉내 내고 싶지 않아 졌다.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내가 나를 지켜내기 위해 애써 더 가시 돋친 말을 뱉었던 건.

웃자고 한 소리에 왜 화를 내냐는 말에는 웃을 수 없는 말이라고도 해보고, 어떤 무례함이 훅 들어오는 날에는 한 발 물러서며 선을 넘지 말아 달라 했지만, 그깟 일에 예민하게 반응한다고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래서 말은 한껏 더 독해졌다. 모든 말에 애써 반응을 하며 살아오다 보니, 어느새 그 모습이 내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고치지 않은 사투리 때문에 살면서 숱한 오해를 받았다.

조지다는 표준어인데도 내가 쓰면 욕한다고 혼이 났고, 심지어는 이발하셨느냐는 질문도 내가 하면 신발처럼 들린다고 했다. 의도가 없는 내 순수함이 욕처럼 들린 건 내 억양 때문이었는지, 상대 머릿속에 있는 내 고향이 남쪽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 선배 때문에 성우의 꿈을 버린 건 아니었을 거다. 사투리가 고쳐지지 않을 것 같아 일찍이 포기하고 적당한 핑계를 찾은 거지. 그래도 그날 나한테 그랬으면 안 됐다. 실컷 그 언어로 겨울 방학을 막 마치고 온 나에게 굳이 다른 건 제쳐놓고 내가 20년을 써온 그 살 같은 언어를 비웃을 필요는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짜장면이 표준어로 지정되었다. 아나운서만 자장면이라고 하는, 비비다 만 것 같은 그 표준어를 실제로 그렇게 발음하는 사람을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 시간 동안 그 선배의 생각은 바뀌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무식하다고 했던 그 무례를 기억이나 할까?


이제는 누가 나에게 사투리를 쓴다고 하지 않는다. 사투리만큼 듣고 쓴 시간이 있다 보니 흥분하지 않으면 억양도 잘 잠재우고 있을 정도로 어느새 흉내 비슷한 걸 내고 있어서.


그래도 사투리만 담을 수 있는 그 단어의 맛이 있어서 나는 가끔 사투리를 쓴다. 근데 이 사투리도 이제 희미해지고 있다. 광주나 가야 사투리가 좀 나온다. 상대가 받아쳐줘야 그 맛도 사는데, 전라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뱉는 사람을 서울서 볼 기회가 별로 없다.


동시에 이제야 나는 내 말의 가시를 빼려고 노력 중이다. 나를 지키기 위함이 누군가의 순수를 해함이었을 수 있기에.


신기한 건 졸업할 즈음엔 서울 친구들이 전국 각지의 사투리들이 어설프게 배어 이도저도 아닌 언어를 썼다는 것. 그만큼 중독되는 맛이다. 사투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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