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이 없는 날은 불안했다.
엄마는 길 건너 빵집에서 빵을 사 올 때마다 장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혀를 차셨다. 그렇게 자주 가는데도 따뜻한 인사 한 번 건네는 법이 없다고, 알은체 없는 빵집 아저씨가 참으로 냉정하다고 하셨다.
내가 가끔 가서 빵을 샀는데도, 아저씨는 항상 무서운 표정이긴 하셨다.
그리고는 영문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빵집은 문을 닫았다. 인사를 안 건네도 그 빵집이 없어지니 아쉬운 건 우리였다.
거실 등이 또 흔들린다. 필시 체중이 어마무시한 사람이 냅다 거실을 가로지르는 것이리라. 또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그냥 흔들리는 게 아니라, 언젠가는 저 집 바닥이 꺼져서 내가 그대로 깔려 죽을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인 날도 많았다.
참다 참다 엄마에게 “엄마. 올라가서 이야기 좀 해봐. 아니 이러다 천장 무너지겠어. 아랫집도 사람 산다고 좀 알려줘. 공부하는 학생이 집중을 못 한다고!!”
엄마는 한창 뛸만한 애가 사나 보지 하고 적당히 이해하고 살자고 하셨는데, 어느 날은 유독 거실 등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엄마 이래도 안 다녀올 거냐고 엄마를 채근했고, 엄마는 마지못해 윗집 초인종을 눌렀다. 그런 엄마를 응원하며 곤란한 그 자리에 따라나서지는 않았지만, 엄마 말론 그 집 딸이 문을 열었는데, 동생들 안 뛰게 하겠다고 죄송하다고 했단다.
그리고는 얼마 후 그 집 아주머니가 찾아오셨고, 죄송하다고 하셨다. 빵집 아주머니였다. 아저씨가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빵집을 문 닫고 요새 일을 다니느라 바빠 미처 챙기지 못했다고; 쌍둥이들이 뛰지 말라고 해도 자주 뛴다고 죄송하다고 하셨다.
아주머니의 방문 뒤에도 혈기 왕성한 두 형제는 연신 뛰어다녔다. 다행인 건 천장 등이 흔들려 부딪칠 때마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천장 등은 무사했고, 천장도 내려앉지는 않았다. 아주머니의 방문 뒤에 우리는 그 집에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아니 올라가지 못했다.
사실 내가 수험생이긴 했어도 책상이 있는 내 방이 아닌 거실에 있었다는 건 공부는 안 했다는 거고, 애들 뛰어다닐 때 아픈 빵집 아저씨가 제일 골 아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참는 쪽을 택했다.
매일매일 전쟁 같이 흔들리던 천장 조명이 흔들리지 않는 날은, 괜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오랜 시간 병원에 있어 본 우리인지라 안 좋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혹시 아저씨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층간 소음이 우리에겐 어느새 빵집 아저씨의 안부가 되었다.
서울로 올라오고 오래간만에 찾은 광주에서 평화를 만끽하다 문득 엄마에게
“엄마. 왜 위층 조용해? 이제 커서 더 안 뛰나?”하고 물었었다. 막상 물으면서도 답을 듣기가 두렵기도 했는데, 엄마도 같은 걱정을 하셨었나 보다.
“엄마도 궁금했는데, 이사 가셨대”
휴 다행이다.
그 쌍둥이들도 이제 꽤 컸을 건데, 누군가의 층간 소음을 이해하는 삶을 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오빠에게 한창 뛰어놀 나이의 아들 둘이 있고, 오빠는 2층에 산다. 특히 둘째 조카가 발망치를 가지고 태어난 지라 새언니가 유독 1층에 미안해했는데, 수험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들은 뛰면서 크는 거라고 괜찮다고 하셨다고 한다. 엄마랑 내가 참아낸 그 시간들을 어느 수험생과 엄마도 참아주고 계셨다.
그렇다고 내가 층간소음에 마냥 관대한 건 아니다. 혼자 오피스텔에 살 때 유독 층간소음이 심했는데 그땐 경비실에 전화도 자주 하고, 겁은 났지만 윗집 초인종도 눌렀었으니.
그래도 옆집 남자가 밤마다 같은 곡을 같은 구간을 반복해서 부르는 건, 응원했었다. 오디션이든 가요제든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라며.
층간소음에 대한 뉴스기사를 볼 때마다 그 고통을 알 것 같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먹먹하다.
지금도 층간소음이 들리면 한 번씩 인상이 써지다가도 또 그때 생각이 나면 ‘잠깐 이러다 말겠지’하고 만다.
코로나 기간 동안 유독 재택이 많았다. 화장실이 특히 방음에 취약해 싸우는 소리도 들리고, 어느 집 잔소리도 들리고 했는데, 거리 두기가 한창인 때라 사람 사는 소리가 나쁘지 않았던 기억이다.
그게 누군가가 살아 있다는 삶의 소리이기도 하니깐. 그게 누군가의 안부도 되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