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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May 18. 2023

1980.05.18.

민주화운동 그리고 누군가의 결혼기념일


광주의 딸에겐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날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하다.


엄마, 아빠는 곧 닥칠 광주의 아픔을 모른 채 이 푸르른 날 수줍게 손을 잡고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빠는 까마득한 그날들을 저버리고 먼저 이 세상 소풍을 끝냈다. 그 뒤로도 얼마간은 결혼기념일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가 계셨다면 사랑한다고 했을 거라고 감히 상상도 못 할 그 빈자리를 내 딴에 어설프게 어루만졌었다. 결혼기념일날 꽃 한 송이 건네는 신랑이 없는, 여자로서의 엄마 인생을 나라도 알아줘야겠다 싶어서. 그때마다 엄마는 아빠도 없는 날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애써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들추는 이 전화를 불편해하시는 것 같아 어느 순간부턴 그 전화도 드리지 않았다.


아빠가 떠나시기 몇 해 전에 김정현 작가님의 소설 “아버지”를 읽고 그 어린 나이에도 참으로 많이 울었었다. 췌장암에 걸린 아스라이 죽어가는 아버지가 슬펐다는 기억만 남아 있어 기억을 되살릴 겸 얼마 전 도서관에 들러 일부러 그 책을 빌렸다. 빌린 건 좀 됐는데 다시 마주할 용기가 없어 책을 쉽사리 펼치지 못하고 있다가 어젯밤 작정하고 책을 펼쳤다. 역시나 중간에 덮지 못하고 끝을 내고 나니 새벽 4시가 되었고, 얼마나 울었는지 눈도 코도 퉁퉁 부었고 꺼이꺼이 울어내고 나니 목도 아프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한 계기도 그 책이었다. 막연하게 누군가는 아빠를 기억해야 한다고 늘 버킷리스트에는 “아빠를 기록하기”가 있었는데, 언제고 기억날 것 같아서 미루고 미뤘었다. 어찌 잊으랴 싶어서 맘만 먹으면 써 내려갈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 사이 오롯했던 기억들은 몇 가지 단편적인 기억들을 제외하곤 너무 많이 희미해져 버렸다.


아빠를 보내드려야 한다는 걸 안 건 가시기 이틀 전이었다. 셋째 고모가 아빠가 실은 회복될 기미가 없다고, 너무 늦게 알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야기한다고 하셨다. 이틀의 시간 동안 중환자실 면회 시간에 들어가면 다른 말은 못 하고 “아빠 사랑해”만 귀에 대고 반복했다. 다른 어떤 말이 남아 있으랴 싶었다. “아빠 안 죽어”로 시작했던 면회가 끝이 가까워올수록 “엄마 말 잘 들어”라는 당부로 바뀌었다. 내가 마냥 어린애도 아니고 감당은 내가 하는 건데 왜 나한테만 다들 쉬쉬했나 하는 원망을 참으로 많이 했었다.


오늘 이 책을 읽으니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겠다. 하루라도 내 딸이 덜 아팠으면 해서. 그리고 하루라도 끝을 모른 채 희망을 밝히는 딸이 보고 싶으셨을 거라는 걸. 엄마가 “당신은 뭐가 제일 걸려?”라는 물음에 “나중에 OO이 결혼식에 손을 못 잡아주는 게 제일 걸려”라고 가시는 순간까지도 딸이 눈에 밟혔을 아빠에게, 더 잊혀지기 전에 추억을 조금씩 꺼내보려 한다. 너무 사소하지만 이제 그게 전부인 아빠를 기억하려고.


이제 그때의 엄마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는 나는 아직도 마음이 이다지도 여린데, 홀로 섰던 엄마는 그때 어떤 마음이셨을까. 건강이 날로 안 좋아지고 있는 엄마가 얼른 기운을 차리시기를 바라며, 저 생에도 들릴까 싶어 말해 본다.


“엄마아빠! 결혼기념일 축하해. 그날 덕에 내가 이 찬란한 세상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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