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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May 02. 2023

조직에 있기 아까운 부적응자

퇴사의 이유 1)


2022.10.21


친한 동료들, 선배들이 종종 나에게 조직에 있기 참 아까운 사람이라고, 어찌 이 갑갑한 조직생활을 견디고 있냐고 농담 삼아 이야기할 때, 속으로 ‘역시 이 조직이 나를 담기엔 너무 작지’라고 생각하며 그게 대단한 칭찬인 줄 착각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어쩌면 ‘버거움 때문은 아니었을까’싶다.


나는 나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 앞에서 크게 주눅 들지 않았다. 어느 날 상사 K가 회의 참석자들의 직급을 물었고, 나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상사 K는 앞으로 회의에 들어오는 사람들 직급 정도는 파악하라고 하면서, 그게 기본이라고 했다. 회의에 직급을 미리 알고 가야 할 필요에 대해 공감하지 못해 그 이유를 물었다.  


나: 직급을 꼭 파악해야 할까요?
상사 K: (진짜 이것까지 알려줘야겠니의 표정으로) 직급을 알아야 말을 조심하지.
나: 직급을 몰라야 하고픈 말을 다 하고 나올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상사 K:... (말을 말자)


회사는 수평문화를 표방하며 “님”문화를 정착시켰고, 챌린지가 건강한 조직문화를 만든다고 하나, 발전적인 챌린지라도 여전히 하극상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회의를 들어갈 때 직급을 파악해야 하는 이유를 머리로는 알면서도, 내 마음은 동하지 못했다. 나는 직급 높은 분들에게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는 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여전히 그런 사람이다.


부조화, 부적합, 부적응.

그 단어들이 나를 설명하는 단어 같았고, 퇴사를 결심하고 돌이켜보니 모든 지표가 퇴사로 귀결되었다.


1) 내마음보고서


과장 승진 교육에서 받은 심리검사. 정곡을 찔린 것 같아 읽는 내내 신기해하면서도, 혹여 누가 이걸 보고 과장 직급을 떼어 버릴까 봐, 혹은 회사에서 자르기라도 할까 봐 내심 조마조마했던 그 보고서.


OOO님의 두드러진 심리코드 첫 번째. OOO님은 자기만의 원칙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세상이 정해 놓은 규율에 무조건 맞춰가며 살기보다는 스스로 판단하기에 합당하다고 여기는 원칙만 수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특성은 사람들이 존중하는 권위적인 체계나 관습적으로 유지되어 온 견고한 시스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비합리적이라고 여겨지면 거리낌 없이 도전하고 새로운 것을 주장합니다. 자신의 필요나 판단에 따라 합리적인 것을 선택합니다. 그런 점에서 OOO님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의 방향이나 인생의 중요한 결정뿐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일들에 대해서도 주체로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합니다. 자신의 선택을 중요하게 여기고 통제하려는 욕구가 높습니다.
OOO님은 윗사람(직장 상사나 선배, 혹은 부모 등)을 평가할 때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평가 기준이 있습니다. 윗사람이 ‘역할에 걸맞은 능력을 갖춘 사람’인지 아닌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 기준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윗사람은 전적으로 신뢰하고 존중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느끼면 불만이 생기고 마음이 심히 불편해집니다.


이게 나인 걸 알면서도, 부정하고 싶은 불편함. 하지만 그 이면에 12년을 어떻게 견디어 온 걸까 하는 마음에 내심 내가 조금 짠해졌다.  


2) MBTI: ENTJ


나의 MBTI는 ENTJ다. 인터넷에 떠도는 공짜 MBTI가 아니라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받은 MBTI라 꽤나 정확한. 때론 굉장히 충동적이라 ENTJ가 아니라 ENTP인 것 같지만, 어쨌든 관련된 내용을 찾아볼수록 뼈 때리게 나 같다.   

ENTJ의 직장생활을 찾아보니 “무능한 상사를 참아내지 못하고, 비효율을 싫어하고, 보수적이고 고착화된 가치관에 저항하는 성격”으로 상사를 잘 만나면 조직생활이 무난하나, 상사와 충분히 충돌할 수 있는 성격. 윗사람에게 건방지고 도전적으로 느껴지는 성격이란다.

그래서 상사 K가 내가 몇 날 며칠을 고생해서 만든 교육자료로 외부 교육을 하면서도, 굳이 나를 “굉장히 aggressive 한 후배”라 소개한 건가.


3) Hogan test


그리고 일기를 쓰는 순간엔 MBTI가 마지막 지표였는데, 11월에 알게 된 나의 Hogan test 결과는 부적응을 입증해 준 마지막 지표.


회사 내 잠재적 리더에 선정되고 나서 포춘 500대 기업에서 성격진단으로 활용한다는 HOGAN 테스트 결과를 받고 내 눈을 의심했다. 만점은 10점이 아닌 100점이었고, 내 점수는 극단적이었다.  

 

(ㄱ) 절차준수(규정을 따르고 관례를 존중함) 中 신중성 (성실하고 규칙을 준수하며 신뢰할 수 있는 정도) 7점

이 차원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은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편입니다. 그리고 조직의 일원으로서 역할에 충실한 경향도 있습니다. 한편 낮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은 유연하고 적응적이며 불확실성에 대해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계를 시험하려 하고 세부적인 부분을 꼼꼼히 챙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ㄴ) 거시적 사고(다양한 사업 관련 문제를 해결함) 中 괴팍성(독특한 사고 패턴에 기이하고 비현실적이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위험 정도) 96점

이 차원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은 호기심이 많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견문이 넓은 편입니다. 비즈니스와 기술 분야의 최신 지식을 유지하는 것을 즐기며, 틀에 박힌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편 낮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며 한정된 분야에 관심을 집중하는 편입니다. 정규 교육보다는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을 선호하는 행동지향적이고,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ㄷ) 친화적 태도(협조적이고 상냥하며 사람들과의 교류를 추구함) 中  자기 조절(압박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낙관적이며 심리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정도) 11점

이 차원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은 협력적이고 우호적이며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편 낮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은 솔직하고 직설적이며 심지어 도전적인 편이어서,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반대의사를 숨기지 않으려 합니다.


신중함 따윈 없는 괴팍하고 자기 조절이 안 되는 인간이면 회사가 나를 잘랐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보니 이 결과를 인사팀에 보내고 실업급여라도 받았어야 했다.


내 마음보고서와 MBTI가 순한 맛이었다면, Hogan test는 매운맛이었다. 어찌어찌 재미로 ‘나 이런 사람이네’ 하고 웃어넘기던 걸 Hogan test결과를 보고는 사뭇 진지해졌다. 특히나 위의 항목은 일부의 점수일 뿐 대다수의 항목이 꽤 높거나 꽤 낮은 다소 극단적인 점수들이었다. 가히 충격적인 결과를 접하고 처음으로 ‘나의 조직생활이 누군가에게는 해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사 K가 말한 것처럼 일제강점기였다면 끝끝내 저항하며 독립투사가 되었을 거라는 나는, 위에 적당히 조아릴 줄 아는 사회생활 스킬 따위는 애초에 타고나지 않은, 조직 부적응자였다. 문제는 조직 부적응을 인정하고 그걸 고쳐서까지 직장 생활을 더 잘 해낼 자신이 없다는 거다. 나는 동료, 선배들 말대로 조직생활에 있기는 아까운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조직이 아닌 다른 곳이 차라리 나을, 조직에 있기는 아까워 방류하고픈 부적응자. 이제 그 말뜻을 이해할 것 같다. 버거워서 다른 곳이 더 적절할 수도 있을 거라는 말. 어떤 이유에서든 조직이 내가 있을 곳은 아니라는 생각을 나도, 내 주변 사람조차도 하고 있다는 건 fact였다.


오늘의 결론은 역시 ‘퇴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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