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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Jul 19. 2023

엄마와 내가 다른 처지가 된 날

사이드미러로 엿보이던 쓸쓸함



광주를 가는 건 늘 밀당이 필요했다.

광주에 갈까라고 물으면, 한 번에 “응, 와”라는 답이 오지 않았다.


나: 엄마 이번 주에 광주 갈까?
엄마: 아니, 오지 마.
나: 왜? 나 안 보고 싶어?
엄마: 응. 차비 아깝게 뭘 와. 아쉬우면 영상통화해.
나: 차비 얼마나 한다고. 영상은 보는 것 같지가 않아.
엄마: 차비 아껴서 소고기 좀 사다가 구워 먹어.
나: 차비 써서, 엄마가 사주는 소고기 먹고 오면 안 돼?
엄마:... 혼자 구워 먹기 쓸쓸하면 와.


결혼 전엔 (신랑과 연애에 미쳐있을 때 빼곤) 한 달에 한 번 꼴로 광주를 갔다. 어떨 땐 엄마보다는 커가는 조카들이 더 보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조카들을 보러 가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엄마도 있었다. 엄마는 어느 순간엔, “네가 나 보고 싶어서 오냐, 애들 보러 오는 거지?” 했지만, 조카들만 있으면 광주를 가지는 않았다. 엄마가 있는 광주니깐 간 김에 조카들도 본 거지.


우리 집에 가는데 뭔 허락이 필요할까 싶지만, 딸이 비싼 기차값을 꼬실러 놓고 와서는 하루 종일 퍼질러 자거나, 정오가 넘어 일어나는 통에 혼자 밥을 먹기도 그렇다고 기다리기도 뭐 해 허기지기 일쑤고, 종일 집에 있는 게 좀이 쑤셔 산책이나 나갈까 하면 어찌나 행동은 굼뜬지 기다리다 숨이 넘어갈 지경이고, 기껏 와서 조금 살아났다 싶으면 조카들과 놀아주느라 정신이 팔려 있으니, 오롯이 주말을 저당 잡혀 산나물 캐기 좋은 여유진 주말을 날리는 게 엄마 입장에서도 굳이 셈이 안 맞는 거였다.  


못 오게 하면 끝끝내는 유치하게 “나야 산나물이야?” 물어도 끝내 답은 “산나물”이었다.  






우리 가족들은 뭐가 그리 아쉬운지 한 번 모이면 잠들기 직전까지는 절대 각자 방으로 흩어지지 않고 거실에 모여있다. 엄마는 잠시라도 짬이 생기면 “식 영상이나 한 번 틀어봐”하면서 오빠와 새언니 결혼식 동영상을 보는데, 그날을 보면 꼭 한 번 으스러지게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너무 애처로워 보이는 엄마가 있다.

   

새언니는 나랑 다르게 그 비싼 혼주 메이크업을, 그것도 시어머니를 새언니가 메이크업받는 샵에서 받게 해 주었다. 사돈 어르신이 워낙 미인이시고 젊기까지 하셔서 엄마는 그 예쁜 화장을 받고도 예쁘다는 말은 사돈 어르신이 들으실 말이라며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 했지만 늘 바삐 살아오느라 대충 편하게 살아온 엄마가 메이크업을 받고 나니 새삼 그 고운 얼굴이 드러났다. 화장 한 번 제대로 할 시간 없이 늘 일에 치여, 자식에 치여 살아온 시간들에 엄마의 청춘을 갉아먹은 일말의 죄책감마저 일 정도로 너무도 고왔다. 물만 묻히고 살아온 그 손으로 오빠 식장에 들어갈 거냐고 한사코 마다한 네일아트를 받고 나서는 엄마는 순간 미소도 머금었다.


화사한 얼굴로, 사돈 어르신과 나란히 맞춘 고운 색 한복을 차려입고, 덜 투박해 보이는 양손을 포갠 엄마는 하객들을 맞을 땐 분명 웃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어쩐지 양가 어머님 입장 때부터 고운 얼굴을 푹 숙인 채 내내 땅만 봤다. 초에 불을 붙이는 순간도 뭘 잃어버린 사람처럼 땅만 볼 뿐이었다.  


다행히 아무것도 모르는 오빠는 “나 장가간다!!!!”하고 힘차게 외치고 식장 안에 들어섰고, 이윽고 사돈 어르신 손을 잡은, 누가 봐도 오늘의 주인공인 새언니가 활짝 웃으며 입장했다. 화색이 도는 신랑신부의 모습에 내내 기분이 좋았다. 둘은 눈빛만 마주쳐도 웃었다. 나도 나중에 결혼할 때 웃는 신부여야겠다 다짐할 정도로 새언니는 참으로 예쁘게 웃었다.


웃는 와중에도, 그 비싼 신부화장을 경우에 따라서는 말끔히 씻겨준다는 양가 부모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는 시간이 다가왔다. 모르는 사람 결혼식에 가서도 신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며 울먹이는 신부를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았던 터라 마음을 단디 잡고 있는데, 우리 새언니 전혀 울지 않았다. 원래도 예쁜 얼굴이 한껏 더 돋보이게 핀조명을 받아가며 방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이제 엄마에게 인사를 온 신랑신부.


새신랑은 울먹임을 겨우 삼켜낸 고운 속눈썹이 처참히 뜯겨나간 어느 여인을 보고 미소를 거두고 눈시울을 붉히다 이내 굵은 것들을 떨궈내기 시작했다. 결혼식에 집중하느라 연신 땅만 보던 엄마를 잊고 있었다. 식 내내 울어버린 엄마와 그녀를 지켜보는 오빠를 보며 나도 막 울려는 찰나에 사돈 어르신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연 있는 집에 딸을 시집보내신 것 같은 기분에 나까지 보태지 말자는 생각으로 눈물을 꾹꾹 눌러보려 했지만 쉬이 주워 담아지진 않았다.


오늘부터 믿고 살아가야 할 동반자인 신랑은 물론이거니와 그 신랑을 내어주시는 어머니에, 시누이까지 모두가 우는 그 결혼식에서 우리 새언니는 진짜 괜찮았을지 모르겠다. 애써 묻지 않았다. 엄마 말에 의하면 속아지 좋은 새언니였더라도 그 어린 나이에, 울음바다가 된 시댁을 마주한 결혼식은 적잖이 당황스러웠을 거 같아서.


그렇게 빨갛게 격앙된 우리 가족이 담긴 그 영상을 엄마는 왜 그토록 좋아하는지. 왜 그리 울었냐는 물음에 아빠 생각이 나서 그랬다고 했다.


아마 입장 전부터 이미 속이 시끄러워진 엄마는 우느라 오빠 결혼식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고, 그래서 영상으로 그날을 보고 싶어 한 것도 같다.




그래서 내 결혼식은 하기도 전부터 걱정이 되었다. 비싼 돈 주고 받은 메이크업 지워지니 울지 않겠다는, 결혼식 사진 예쁘게 나오려면 신부는 무조건 웃어야 한다는 어느 예비 신부의 다짐 글에 나도 울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건만 엄마만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날이 다가올수록 걱정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내 걱정이, 내 우려가 무색하게 엄마는 내 결혼식에서는 전혀 울지 않았다. 나는 울컥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대체로 웃었다. 웃어야 했다. 엄마랑 사진 찍을 때가 그랬고, 신부 부모님께 인사하라고 할 때가 특히 그랬지만, 엄마는 그때마다 내 손을 붙들거나 나를 꼬옥 안아 주면서, “좋은 날 울지 마”라고 했다. 덕분에 한참 결혼식 뷔페에서 확진자가 하나 둘 나오고 있을 때고, 코로나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이 공포감만 확산되고 있던 때라 결혼식에 오신 분들도 많이 불안했던 차였는데, 잠시나마 웃는 결혼식이라 보기 좋았다는 말을 참 많이도 들었다.


엄마도 울지 않고, 나도 덕분에 신부화장은 지켰지만, 엄마는 왜 내 결혼식에서는 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참 오랫동안 했다. 오빠 결혼식에서는 그렇게 아빠 생각이 났다면서, 정작 아빠 손이 아닌 오빠 손을 붙잡고 입장하는 나를 보고는 엄마는 왜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찍힌 사진마다 함박웃음인 건지. 내심 서운함이 느껴졌었다.





지금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신랑 없이 아들, 딸 다 제짝 찾아주고 부모로서의 숙제를 끝낸 엄마는 오빠가 장가갈 때랑 다르게 내 결혼식에서는 어쩌면 홀가분한 기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짐을 부단히 무겁게도 짊어지고 온 세월이 있었기에.


엄마가 그리운 날에 문득 전화를 걸어 말 한마디 못하고 울기만 하는 스무 살의 딸에게 엄마의 첫마디는 “누가 아빠 없다고 뭐라고 해?”였다. 애비 없는 자식 소리 듣는 게 제일 무서웠던 엄마에게 어느 날 가장 친한 친구가 부모님 한 분이라도 안 계신 혼처에 자식들 시집장가보내기 싫다고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엄마는 며칠 밤을 혼자 아팠다. 지금은 말 많은 우리 셋 등쌀에 아빠가 힘들어 먼저 간 거라는 농담도 할 수 있으나 돌아가시고 몇 해 동안은 어느 누구도 아빠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한 동안 아빠의 부재는 우리 집의 금기어였다. 아빠의 부재를 흠잡지 않는 곳으로 시집 장가보내고 나니 20년이 넘도록 애비 없는 놈 소리 들을까 봐 전전긍긍 속앓이를 했을 엄마의 마음에 잠시 햇살이 들었으리라. 내 결혼식 스냅사진에는 신부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가 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간 광주에서 엄마의 사랑을 실컷 느끼고 서울로 오려는데 엄마와 나의 처지가 달라진 게 새삼 실감이 났고, 그때 엄마의 쓸쓸하다던 단어가 가슴에 맺혔다.

돌아보고 돌아보고도 미련이 남아서 사이드 미러로 멀어져 가는 엄마를 보면서 나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고, 백양사 휴게소가 지나도록 조금도 잦아들지 않은 울음소리는 가뜩이나 흐린 날씨에 요란한 천둥소리처럼 차 안의 정적을 깼다.


광주는 대학시절을 제외하고는 늘 KTX를 타고 내려갔다. 우리 가족들은 내가 광주만 가면 언제나 기차역에 나와 있었다. 엄마가, 아니면 오빠가, 어느 날은 오빠랑 새언니랑 조카가. 나는 늘 광주역(지금은 광주송정역)에서 가족들의 마중과 배웅으로 광주의 온기를 안고 서울로 와서는 또 얼마간은 그 기억으로 잘 지내곤 했다. 그래서 나는 단 한 번도 혼자 있는 게 쓸쓸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온기가 사라질 즈음엔 다시 광주로 가면 그만이었으니깐.


엄마: 광주 오지 마.
나: 왜?
엄마: 차비 아깝고, 북적북적 있다가 서울 가 혼자 있을라면 쓸쓸하잖아.
나: 엄마도 똑같지 뭐. 그렇다고 안 보고 살아?

 

북적이게 있다가 혼자 있어지면 엄마는 내내 쓸쓸했던 거다. 그 쓸쓸함을 알기에 나는, 엄마를 광주에 두고 오면 꼭 며칠씩은 아프다.


그 쓸쓸한 사람이 전화를 해서 “가만히 누워서 생각하니 너만 아들이든 딸이든 하나 있으면 좋겠어”했다.


결혼 전엔 아빠 산소에 갈 때마다 언제까지 딸 안 놔주고 보듬고 살 거냐고 좋은 짝 하나 내려 주라고 저승에서 혼났던 아빠가, 지난번엔 저들 둘만 살게 할 거냐고 예쁜 놈 하나 안 내려주고 뭐 하냐고 또 혼나는 걸 본 터였다. 아빠,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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