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연 그 끈을 놓을 수 있을까?
** 긴글주의)))
프라하로 떠나기 전 엄마가 내 통장으로 100만 원을 보냈다.
돈을 벌고 있는 딸이 여행을 간다는데 엄마는 여행 경비에 보태라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오라고 용돈을 두둑이도 보냈다. 유독 액수가 많아 이상하긴 했지만, 한 번씩 보내주시는 용돈도 엄마의 사랑표현이라 생각하고 넙죽 받아서 잘도 쓰는 나라서, 돈을 받자마자 면세점에서 평소 눈독 들이던 시계를 샀다.
그리고 동유럽 구석구석을 누비고 10일 만에 다시 한국에 왔다.
여행에서 잔뜩 짊어지고 온 기념품들의 떼샷을 찍고 있는데, 평소 같지 않게 오빠가 잘 다녀왔냐고 전화를 했다.
그리고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낸다.
엄마가 지금 병원에 있다고. 수술을 했다고.
“수술????????”
4월 한 달을 퇴사의 홀가분함에 취해 한껏 여유를 누리다가 마지막 주에 찾은 광주에서 아픈 엄마를 마주했다. 왜 이리 입맛이 도는지 모르겠다고 돌아서면 입이 궁금하다고 한 엄마가, 늘 성격이 급해 발걸음을 재촉하던 엄마가, 웬일인지 밥을 잘 먹지도 못했고, 몇 걸음 걷고는 이내 앉을 곳을 찾았다.
엄마를 두고 다시 서울로 온 나는 며칠을 울면서, 내내 아팠다.
어버이날 아침.
외할아버지 부재중 6통, 작은삼촌 부재중 2통이 찍혀있다. 필시 엄마에게 무슨 일이 난 것이랴 싶어 바로 전화를 드렸다. 밤잠을 설친 피로가 묻어있는 외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눈물부터 고인다.
엄마는 혼자 계신 아버지가 걸려 일요일이면 할아버지댁에 들러 저녁을 드시곤 했다. 어제는 어버이날을 앞둔 터라 들리셨을 거고, 밥 먹는 게 영 시원찮은 딸이 밤새 걸린 할아버지는 다음 날 아침부터 손자, 손녀에게 전화를 하신 거다. 엄마가 아파 밥을 통 못 먹는다고 걱정하시기에 걱정 마시라고 하며 가을 즈음에 건강검진을 시켜 드릴 예정이라고 하니 뭘 가을까지 기다리냐며 역정을 내신다. 외손녀에게 역정을 내시는 법이 잘 없는데, 애간장이 탈 외할아버지가 밟혀 좀 더 빨리 알아보겠다고 하며, 그래도 뇌의 혹이 악성일까 봐 할아버지의 검사 결과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니 행여 더 편찮으실까 싶어 다시 한번 걱정 마시라고 했더니,
“너도 딸 낳아 한 번 아파봐라. 부모 맘이 어떤가. 내 딸이 지금 아픈데 걱정이 안 되겄어?”
자식이 없는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일까.
임신중독에 걸린 딸이 외손자를 낳다 죽을까 봐, 몇 년 후 장티푸스에 걸려 축 늘어진 딸이 다시 한번 죽음의 문턱을 넘을세라, 할아버지는 출가외인인 딸을 직접 택시에 태워 병원으로 데려가셨다고 한다. 그렇게 애지중지한 그 큰 딸이 다시 아픈데 이제는 택시를 불러 병원에 데려갈 기력도 없으시니 오죽 답답하실까 싶어 전화를 끊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래도 내리사랑은 있지만 치사랑은 없다고 하던가.
자꾸 아들 딸한테 전화를 하시는 외할아버지한테 엄마는 “저 괜찮으니 애들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애들도 바빠요. 그리고 애들도 다 알아보고 있으니깐 전화 자꾸 하지 마셔요” 하셨단다. 그 뒤로도 할아버지는 손자, 손녀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상태를 확인하시고는 말미에 “엄마한테는 할아버지가 전화했다고 하지 마라”하셨다.
엄마는 부산스럽게 호들갑 떠는 걸 싫어하신다. 진짜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고.
엄마 입장에선 별 일도 아닌데, 온 식구들이 돌아가며 전화를 하시니 기력 없는 와중에 많이 귀찮으셨을 수도 있을 거 같다.
뇌의 혹 따위는 영 시답잖은 딸의 숟가락질 보다도 더 하찮은 것이었을까?
암마는 내가 아플 때마다 행여 딸이 기운 빠질까 봐 “수술하면 낫거나, 약 먹어서 나을 수 있는 병이니 얼마나 좋냐”고 하시며 대신 아파줄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는데 우리 할아버지도 그 마음이셨을까?
며칠 전 광주에 간 김에 외할아버지, 큰삼촌과 저녁을 먹었다.
엄마가 조금 기력을 찾고 나니 농담할 여유도 생긴 내가 “할아버지 전화하시지, 삼촌 전화하시지, 큰엄마 전화하시지. 전화를 받아도 괜찮다 거짓말도 못하고, 그렇다고 솔직하게 좀 안 좋으신 거 같다고 말도 못 하고 괴로웠어요”했더니, 큰삼촌이 대뜸 “니가 엄마 없음 고아지, 그러니 우리가 전화를 그렇게 하지”하신다.
나이 마흔에도 고아란 단어는 아프고, 여전히 무섭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고아가 될까 봐 마음 졸이며 살아왔다. 그래서 서울에 온 후 수시로 엄마에게 전화를 하는 습관이 생겼다. 수화기 너머 엄마 목소리를 듣지 못한 날은, 괜스레 불안해 밤잠도 설쳤다.
나: 엄마 죽지 마.
엄마: 사람이 갈 때 되면 가는 거지.
나: 아니. 엄마는 아빠 몫까지 더 해서 100살까지 살아.
엄마: 너무 오래 살아도 못 써. 갈 때 가야지.
나: 엄마 가면 나도 엄마 따라갈 거야.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엄마의 부재에 대한 걱정은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대로다.
드라마 닥터차정숙을 보는데, 102세 할머니가 오래 사는 것도 천벌이라고. 자식들이 안타까워할 때 가야 했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왔다. 오래 산다는 거 내 입장에선 당연한 것이었는데, 오래 사는 사람 입장에선 진짜 어떤 의미일까.
엄마는 늘 인명은 재천이라. 인력으로 안 되는 거라고 갈 때 되면 가는 거라고 입이 닳도록 말씀하셨다.
난 늘 엄마가 오래도록 내 옆에서 친구처럼 있어주기를 바랐는데,
그런 엄마가 아빠 산소에 다녀오는 길에 무심코 툭 또 나의 눈물버튼을 누른다.
엄마: 엄마 가망 없으면 연명치료 하지 마
나:... 그럼 장기기부해.
엄마: 장기가 여기저기 아프단디, 어떻게 장기기부를 해?
나: 그럼 오래 살아.
엄마: 사람 오래 사는 것도 벌이야. 가망 없는데 아무 의미 없이 산소호흡기 끼워놓지 마.
나: 그럼 이번에 병원은 왜 갔대?
엄마: 갈 때 가더라도 멀쩡히 살다 가고 싶어서.
왜 엄마는 한 번씩 이런 소리를 하는지.
전에는 갑자기 TV를 보다가
엄마: 나는 죽거든, 수목장 해줘
나: 싫어.
엄마: 좋아하는 나무 냄새 맡을라니깐, 수목장 해줘.
나: 평생을 산을 타고도 죽어서도 산에 묻히게? 그냥 바람에 실려 보낼 테니 세상 구경 하면서 살아.
엄마는 말이 없었고, 나도 더는 말이 없었다.
프라하에서 속 없이 여행사진을 보내는 딸이 행여 눈치챌까 아픈 내색 없이 잘 다니고 있냐며, 많이 구경하고 오라고 답을 했던 엄마였는데, 오빠가 사진을 보내왔다.
갑상선암 수술을 위해 양갈래로 머리를 따고 환자복을 입은 채 병원 밖을 산책하는 소녀 같은 우리 엄마 사진을.
눈앞에 펼쳐 놓은 기념품들이 시야에서 흐려지며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속없는 딸년.
엄마가 보내준 돈으로 시계를 샀다고 자랑하는 나를 보며 병원에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엄마는 수년이 지나서야 그때 그 의사 선생님 이야기를 하셨다. 살면서 본 가장 의사 같지 않았던 선생님이라면서, 항상 진료실에 들어서면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오는 환자들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셨다고 했다.
젊으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수술을 권하는 의사 선생님께 엄마는 수술 안 하고 살면 어쩔까 싶다고. 거북이암이니 그냥 칼 안 대고 살다 가면 좋겠다고 하셨단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단다.
“저희 어머니셨거나 이모님이셨으면 수술 꼭 시키고 건강하게 사시라고 할 것 같아요. 꼭 수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내원해 주세요.”
엄마는 애써 전화를 하신 의사 선생님께 고맙고 미안해서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는 그 수술 이후 매일 아침 작은 알약을 하나씩 챙겨드신다. 이번에 늘어난 새로운 약을 드시며, 약 먹다가 죽게 생겼다고 평생 먹을 약이 왜 이렇게 느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살려면 먹자고, 약을 먹자면 밥도 잘 먹자고 말씀드렸지만, 마음 한편이 내내 불편하다.
‘수목장’
‘연명치료 하지 마’
엄마가 무신경하게 던진 그 말들에서 내가 마주하기 싫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느껴진다. 이제는 어느 나무가 좋겠냐고 물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
엄마도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시니 그런 이야기를 한 걸까? 아니면 엄마가 또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는 걸까? 서울에 오면 생각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면 이내 눈물이 고이고, 그러다 보면 다시 아빠를 보냈던 그 시절로 돌아가 생각이 머문다.
‘가망이 없다면,,,’이라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엄마가 어느 연유로든 병상에 누워 계신다면, 나는 기적을 바라지 않을까? 나는 없는 가능성도 애써 찾아 헤맬 거 같은데, 가망이 없다는 건 얼마나 큰 절망감일지 생각만으로도 이미 가슴이 미어진다.
연명치료하지 말란 이야기를 듣는 순간 여러 생각이 겹쳤다. 얼마 전 읽은 "아버지"에서 고통스럽게 죽느니 안락사를 선택한 그 아버지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던 터였고, 연명치료는 내가 결정할 게 아니라 진짜 의학적으로 가망성이 없을 때 의사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일 거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남은 이들에게 너무 잔인한 엄마의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너무 아팠다.
결혼을 하고 장기기증 서약을 하자는 나에게 신랑은 버럭 화를 냈다.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엄마에게 장기기증을 이야기한 나도 엄마가 진짜 장기기증을 한다고 하면 화를 낼 것 같다. 나는 어떤 순간에도 엄마의 기적을 바라는 딸이니깐.
엄마! 오래 사는 게 천벌이어도,
나는 엄마가 건강히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언제가 되어도 엄마를 보낼 수 없겠지만,
오래 살다가, 진짜 오래오래 살다가
내가 지금 엄마 나이쯤 되면
그때 연명치료를 할지 말지 고민해 볼게
** 2000년 의약분업으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아빠를 잃은 저에게, 2015년 바쁘신 와중에도 따로 전화를 걸어 엄마는 지켜 주신 의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