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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May 10. 2023

참을 수 없는 팀장

퇴사의 이유 3)

심히 불편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된 글입니다. 제목 그대로 “참을 수 없는”에 방점이 찍힌 불편한 글일 수 있어 그 불편함이 우려되시는 분들은 읽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누군가 불편해하실 수 있는 글을 내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내리라는 분도, 그대로 두어도 괜찮다는 분도 계셔서, 일단 나아가되 문구를 추가합니다.

다시 한번 불편하실 수 있기에, 건너뛰시는 것을 권해 드립니다.


퇴사일기를 왜 첫 글로 삼았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퇴사를 고민하시는 분들께 퇴사로 가는 길에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도 있었어를 이야기하고, 일기를 쓰면서 생긴 감정 변화가 너무 신기했기에 같은 고민을 하시는 분들이 쓰시면서 방향을 결정하셨으면 하는 마음과 일기는 또 훔쳐보는 맛이 있기에 슬쩍 투척해 보려고 했는데, 그 안에 제 경솔함이 있었습니다.


이 글에 제가 썼듯이 의도가 좋다고 결과도 좋은 게 아닌데, 제 문장이 저를 향하지 않고 제 분노의 화살만 따라갔습니다.

이미 읽으시고 불편하셨을 분들에게 사과드립니다.  


2022.11.10


나와는 10년 간 이미 관계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지주사에 있던 내가 경멸하는 놈이 2022년 4월 팀장으로 왔다. 


팀장으로 온다는 소문이 났을 때, 상사 K에게 면담 신청을 하고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겪어 보지도 않았는데 도망부터 간다며 나를 비난했다. 지주사와 계열회사의 관계이니 엄연히 다른 회사라 접점이 많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을 뗄 정도라면, 이미 답은 나온 거 아닌가? 하지만 늘 그렇듯 가스라이팅의 힘이란. 나도 내가 어쩐지 나약하게 느껴졌다.


역시나 겪어본 시간들은 최악이었다. 상사 K에게 “제가 존경할만한 포인트를 하나라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했었는데, 아직까지 단 하나의 존경할 포인트도, 그 어떠한 인간적인 매력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가 생각보다 팀장이라는 역할을 너무 잘해서 내가 싫어하는 그놈을 인정하는 날이 오면 어떡하나 라는 막연한 걱정도 했었는데, 다행인 건지 나는 끝끝내 존경할 포인트를 찾지 못했다.


팀장교육을 받고 와서는 one on one에 더 심취해 구성원과의 스킨십을 늘리겠다면서 지속적으로 일대일 면담을 했다. 기대한 구성원과의 스킨십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일 거라 생각했는데, 노트북을 펴 놓고 본인이 일방적으로 묻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 그리고 내 답은 고스란히 타이핑되는;;


팀장: OOO님은 꿈이 뭐예요?
나: 어떤 꿈이요?
팀장: 회사에서 이루고 싶은 거나, 되고 싶은 거요. 저는 임원이 꿈이에요.
나: (그건 목표지, 꿈은 아니지 않나.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던데...) 회사에서 이루고 싶은 게 없네요. 최근엔 더더욱.
팀장: 아니 왜 꿈이 없어요? 꿈을 꿔야지.
나: 그냥 올해의 꿈은 KPI를 잘 마무리하는 거 말고는 없어요.
팀장: 아니 올해가 거의 끝나 가니깐, 내년 꿈이 있어야죠
나: (회사에서 이루고 싶은 게 없다고 했지, 꿈이 없는 건 아닐 건데_사실 꿈도 요새 없긴 해...) 제가 요새 에너지가 없어서요. 내년 꿈은 닥치면 좀 생각해 볼게요.
팀장: 제가 꿈 찾도록 도와줄게요.
나: 아니에요. 제가 찾을게요.

(급 화제전환)

팀장: OOO님은 투자하나요?
나: 갑자기 투자요?
팀장: 집은 자가예요?
나: 아닌데요.
팀장: 요새 집값 좀 내려갈 것 같던데 좀 기다렸다가 집 사요. 타이밍 너무 좋다.
나: 그건 제가 알아서...
팀장: 그럼 주식은 해요?
나: 죄송한데, 자가니 투자니 하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저희가 친한가요?

(잠시 침묵)

팀장: OOO님 나 싫어해? 아니 대화를 하려는 마음이 없네?
나: 네. 싫어요. 지금 반말하는 게 제일 싫고.
팀장: 왜 이렇게 부정적이에요?
나: 뭐가요?
팀장: 아니 질문하면 답하는 게 다 그렇잖아요.
나: 답을 정해 놓고 질문하시거나, 반말하시거나, 아니면 호구조사 같이 실례인 질문을 하시는데 제가 뭐가 그렇게 부정적이었을까요?
팀장: 아니, 대화를 이어가려는 의지가 없잖아요.
나: 그래서 제가 이런 취조 같은 면담은 자주 안 했으면 좋겠다고 부탁드렸는데요.
팀장: 이런 일대일 면담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고요.
나: 저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런 식의 면담을 하고 온 날이면 종일 생각이 많아졌다. 팀장이면 저런 무례한 태도와 사생활을 정통으로 찌르는 질문을 해도 되는 건가는 차치하고, 면담 전에 무슨 준비를 하고 오는 건지, 면담에서 어떤 것을 얻어가려고 한 걸까 하는 생각들에 팀장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근본적인 답을 찾다 보면 어느새 그 단어마저 싫어져버렸다.

가져온 질문지에 다 답을 얻어내겠다는 욕심과 토씨하나 안 틀리게 담아내느라 다른 가지로 뻗어 나가지 못하는 타이핑에 집중된 면담에서, 부정적이라는 프레임을 걷어 내기 위해 팀장 마음에 들기 위한 답을 해야 한다면 이 면담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정작 뼈 때리게 아픈 말이거나, 무릎을 탁 칠만큼 내가 보지 못하는 걸 다른 눈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경외심이 일어 눈을 못 떼겠던데, 어떤 순간에서도 타이핑에 집중되는 면담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는 이런 면담은 진짜 진저리가 났다.


면담이 거듭될수록 내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느낌이 늘었다. 시간은 흐르니 경력은 늘어가는데, 어쩐지 물경력을 만드는 느낌. 그 와중에 그래도 나름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데, 그가 주는 피드백은 빠른 일처리가 다른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니 업무 속도를 조절하라는 것, 일의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니 그걸 역량의 지표로 삼지 않겠다는 것, 회의 시 첫 의견을 내가 내버리면 다른 사람들이 눈치 보느라 의견을 내지 않으니 회의 시 말을 삼가라는 것, 일을 잘하는 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 그 나름의 피드백.


그중 가장 싫었던 건 “OOO님은 리틀 상사 K 같아요. 상사 K랑 비슷하게 머리회전도 빠르고 비상한 아이디어도 잘 내고 일처리도 빠르고, 근데 딱 하나 다른 건 위트가 없어요.”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었겠지. 살면서 위트 없다는 말은 처음 들으니깐. 위트의 뜻을 알고 말하는 건가?’ 이후 대화를 들으니 역시나 위트의 뜻은 모르는 거 같고 대충 재미가 없다는 이야기 같았다. 나는 재미없다는 소리를 안 예쁘다는 소리보다 더 싫어하는데 내가 세상 제일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놈이 나를 평가하니 더 화가 났다. 그날은 나한테 좋은 말을 많이 해주려고 작정하고 온 사람처럼 온갖 칭찬을 했던 거 같은데 다 지워지고 “위트 없다”만 남았다. 면담 말미에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묻기에, 누군가를 닮았다는 말이 꼭 칭찬이 아닐 수 있다는 말만 했다. 사실 네가 위트를 아느냐고, 너는 위트가 있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위트를 논하기엔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나는 그에게 농담 한 마디 건넨 적이 없으니 물어서 뭘 얻을까 싶었다.


상사 K가 참을 수 없는 팀장을 데려오면서 가장 싫은 게 뭐냐고 물었을 때, “재미가 없는데 말이 많아요.”라고 했는데, 역으로 들으니 더 기분이 나빴다.


고과도 주변 동료들에게 이렇게 심각하게 상담하지 않았을 건데, 위트가 없다는 평가는 심히 기분이 나쁜 지라 팀장이 위트가 없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물었다. 다들 콧방귀를 뀌었다. 나를 잘 아는 C가 “너한텐 영원히 재미없을 거라고 해줘. 사람 가리는 위트라고.”

그것으로 겨우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팀장의 팀장놀이보다 그 팀장이 하는 면담이 제일 곤욕이었다. 면담을 하고 오면 자괴감이 들었기에 팀장에게 면담 횟수를 줄여 주셨으면 좋겠다고 청을 드렸건만, 다른 구성원들이 이 면담을 너무 좋아한다고 했다. 다른 구성원들에게 물었으나 어느 누구도 이 면담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는 나만 팀 내에서 성향이 다르다고 했다. 나는 회의를 하면 의견을 내는데 주저함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런 면담에서나 겨우 제 목소리를 낸다고 면담의 순기능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다. 면담을 좋아하는 사람들 위주로 면담을 하시고 말씀하신 대로 저는 언제고 할 말은 하는 사람이니 면담이 아니어도 드릴 말씀이 있으면 하겠다고 했는데 나만 빼고 면담을 할 수 없다고 했다. 형평에 어긋난다고. 


그 면담 이후 며칠 뒤 뭔가 본인이 꿈꾸는 팀의 모습이 있었는지, “출근하면 다 같이 인사하면서 어제 있었던 일이나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10분 정도 프리토킹하는 거 어때요?”라고 물었다. “저는 상관없는데 다들 면담 아니면 속내도 이야기하기 꺼려한다면서, 아침 인사 없이 조용히 앉기 좋아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프리토킹이요?”라고 되물었다. 그가 “아…”하고 자리로 돌아간다.


생각이 짧은 건 늘 곳곳에 묻어났다. 채용 면접에서 면접자에게 장래 포부를 물으며 본인은 임원이 꿈이라고 예시를 드는 그, 공식적으로 잡힌 식사에서 예산 운운하며 법카를 못 쓰게 해 놓고 다음 날 본인이 먹은 칼국수는 법카로 긁은 그, 리더십에 관한 책을 수십 권씩 읽으며 나에게도 언젠가 리더가 되려면 필요하다고 책을 권하는 그. 책을 읽으면서도 일 년 내내 부족한 팀장이라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그.


말이 많은 걸 스스로도 느낀 그가 3 vs 7을 이야기하며 본인이 회의에서 30%만 이야기하겠다고 약속하고 여전히 대화를 장악하고도 먼 산을 보는 구성원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변화 없는 모습은 책을 수천 권을 읽어도 똑같을 것 같다.

연애도 책으로 배우면 탈이 나듯 팀장도 책으로만 배우면 탈이 난다. J가 그랬다. 비슷한 책을 계속 읽는 사람은 책의 활자만 읽는 거지 그 어떤 것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똑같은 책을 계속 사는 거라고.


유퀴즈에 나온 어느 초등학생의 “잔소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데 충고는 더 기분 나쁘다”는 말처럼 그의 잔소리, 충고 이런 게 그냥 기분이 나빴다. 의도가 좋다고 모든 결과가 좋은 게 아니 듯이. 목적이 불분명한 면담에서 얻는 평가를 더 이상은 인내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팀장이랍시고 더 이상 나를 평가하게 두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오늘의 답 역시 ‘퇴사’다.





퇴사 후 10일 만에 우연히 만난 후배들과의 티타임 자리에서 후배들은 하나 같이 10일이 너무 길었다며, 힘들다고 했다. 요새 서서히 팀장에게 지쳐가고 있다고.


퇴사 직전까지도 팀장은 새로 들어온 사람들에게 공을 들였다. 착한 척을 하고 또 했다. ‘그래. 올해 리더십 평가는 잘 받고 싶겠지.’하고 말았는데, 서서히 본색이 드러나나 보다.


새로 들어온 후배들은 소위 요새의 MZ였고, 지각할 거 같으면 출근 중에 유연 근무를 올리거나 때론 반차까지 내기도 했다. 자가결재시스템이고 결재가 완료되면 팀장에게 메일이 가는 구조이니 팀장에게 구태여 알리지 않는 후배들에게 팀장은 전화를 걸어 하고 싶은 말은 꾹꾹 눌러가며 “아, 혹시 몸이 아픈가 해서 걱정되어서 전화했어요”라고 하는 걸 보면서, 좀 통쾌했다.


성형 전 민낯을 아는데, 성형 후에 내 앞에 나타나 원래부터 예뻤던 척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거북하지만, 그래도 계속 예쁜 척해주길 바란다. 아직 미소가 많은 후배들이 표정을 잃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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