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시 드문 일
"여보~ 원피스 왔어. 집에 빨랑 와~~~"
남편이 책을 사달라고 했다.
극히 드문 일이다. 그는 책 보다 TV를 사랑한다. TV시청은 퇴근 후 즐기는 그 남자의 최애 취미다. 변치 않는 사랑이다.
신혼 때부터 순전히 내 취향으로 거실 서재화를 추구했다. 거실이 TV로만 풀가동되는 공간이 될까 경계했다. TV와 눈빛교환하며 소파에만 누워있을 남편이 상상됐다. 그를 미워하게라도 될까 내린 결정이었다.
내 이상형은 다 필요 없고 달랑 두 가지. 키 큰 남자에 뇌색남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웬걸. 뻔한 스토리지만 신은 나에게 이상형과 백 프로 다른 남자를 보내주셨다. 키는 어쩔 수 없지만 독서하는 남자로는 거듭날 수 있지는 않을까 했다. 거실 서재화에도 불구,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남편의 TV 사랑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았다. 이런 한결같으니라고!
그래도 기쁜 건 아이는 책을 즐겨 읽는다는 거다. 내가 자판을 두드리는 이 순간에도 아이는 자기 방에서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다. 사달라고 하는 책은 늘 대기 중. 책을 살 때도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아 신중을 기하곤 한다. 좋은 책은 엄마에게도 적극 추천한다. 반복 읽기를 즐겨한다. 벽돌책 앞에서도 히어로인 마냥 두려움은 없다.
아이에게 한참 못 미치긴 해도 나도 그렇다. 나의 유일한 사치는 책 살 때 한껏 발휘된다.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맛도 맛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내돈내산을 좋아한다. 반납일을 의식해서 촉박하게 읽는 독서보다는 느긋한 독서를 지향한다. 빳빳한 새 책을 성공적으로 딱 한 페이지만 넘겼을 때의 기쁨이란. 책을 읽어내는 속도가 사고 싶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늘 안타까울 뿐이다.
이쯤 되면 우리의 우아한 취미에 살짝 젖어들 법도 한데 여전히 끄떡없는 남자다. 한결같은 마음. 어쩜 그렇게 늘 책을 멀리 하는지. 이름을 김한결이라고 개명해 주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런 남자가 두 눈을 반짝일 때가 있다. 일 년에 딱 두 번쯤! 남편은 <장화 신은 고양이>에 나오는 고양이 눈을 뜬다. 이때만큼은 TV가 아닌 나와 눈을 마주친다. 두 손을 기도하듯 포개며 두 눈을 연신 깜박인다.
바로 그것이 나왔기 때문이다.
원피스! 해적을 소재로 한 만화. 루피가 세계 제일의 대 비보 원피스를 찾기 위해 동료들을 영입. 바다를 항해하고 여러 섬을 모험하는 원피스. 여자들이 입는 원피스 말고 일본 만화 <원피스> 말이다.
책을 멀리하는 아이에게 학습만화로라도 읽는 습관을 잡아주라 하듯. 도통 책을 손에 잡을 줄 모르는 그 남자가 만화책이라도 읽겠다니. 그 부탁이 그렇게도 반갑다. 1초의 지체도 없이 냉큼 들어준다. 언젠가 아이처럼 벽돌 책도 깨부수고, 아내와 함께 고전도 즐겨 읽기를. 말도 안 되지만 잠시 내 멋대로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원피스가 도착했다!
드디어 종이 뭉치를 잡아들고 활자를 읽어 내려갈 남편 모습을 볼 수 있다. 희귀 장면임이 분명하다. 일 년에 몇 번만 목도할 수 있는 그 모습을 두 눈 가득 담아 두련다.
"여보~ 원피스 왔어. 집에 빨랑 와~~~"
사진@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