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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Jul 05. 2023

딱 12시간만 날씬했다.

대학병원 검사가 잡혀 있던 날. 

며칠 전부터 교통편을 탐색했다. 대중교통으로 서울 가는 길은 지옥길. 그런 이유로 4월 이후 한 번도 서울 땅을 밟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

갱년기 호르몬 약 처방을 위한 선검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약 시간 3시 10분.  느긋하게 11시쯤 출발할까 하며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 핸드폰 화면으로 아이 담임 선생님 번호가 떴다. 아이가 등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불길 그 자체였다.


아이가 많이 아파하니 조퇴를 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몇 분 뒤. 아이 상태가 좋지 않으니 데리러 나와 보시는 게 좋겠다는 얘기까지.


난 옷 갈아입을 틈도 없이 브래지어 하나만 더 챙겨 입고 그대로 뛰쳐나갔다. 아이는 걸어오지 못하고 펜스에 기대 있었다. 아이를 걸음마 떼는 아기 마냥 부축해 와서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


엄마의 촉으로 아이는 급체한 듯했다.

급한 대로 소화제 두 알을 챙겨 먹였다. 아이 등을 쓸어 주었다. 소화가 잘 된다는 엄지와 검지사이 혈자리를 꾹꾹 눌러 주었다. 내 손이 우주의 기운을 끌어 모아 약손이 되길 바라며. 오늘 서울행은 어그러졌다 생각하고 있을 때. 또다시 핸드폰 벨이 울렸다.


남편이었다.

으로 오고 있으니. 서울 갈 준비를 하라고.





바통을 남편에게 넘기고 난 서울로 향했다.

접었던 마음실행에 옮니 허둥지둥 그 자체였다. 광역버스 정류장까지 택시를 잡아 탔다. 기사님은 내 마음을 간파하기라도 한 듯. 말리고 싶을 정도로 속도를 내어 목적지에 내려 주었다.


배차 간격이 속 터지게 길었던 서울행 버스.

집에서 나온 지 자그마치 한 시간 . 버스 위로 발을 올릴 수 있었다. 기다림은 지쳤지만 2층 버스는 설렘을 주었다. 버스는 여행 떠나 나게 달려 강남 한복판에 나를 내려 주었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내린 자리에서 또 다른 광역 버스로 갈아타야 했으니까. 3분 뒤 운 좋게 내가 타려던 차가 도다. 올레~


평소 같으면 직장인과 대학생들로 북적였을 버스였는데. 골라 앉을 만큼 자리는 여유로웠다. 좌석 앞에는 휴대폰 충전기도 있었다. 정신없이 나와 간당간당한 배터리를 보며 한숨이 나왔는데, 그 와중에 충전기를 들고 온 나를 칭찬했다. 음하하.



그날 차창 풍경과 소중했던 충전의 시간


이제 병원 앞에 잘 내리기만 하면 된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을 때. 바로 나를 깨운 건 저 깊숙한 곳 묵직이 울린 배꼽시계 소리였다.

꽈~ 르~  륵~~~


누가 들었을까 신경 쓰일 정도로 우렁찼던 소리.

맞다! 아픈 아이 돌보다 물 한 모금 마시지 했다. 그 채로 집을 나와 서울행 버스에 올라탔던 것이다.


몰랐다.

그때까지 배가 고픈 줄도. 목이 마른 줄도. 에 있었으면 뭘 먹어도 먹었을 시간이었다. 비자발적이긴 하나 꽤 긴 공복을 견뎠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밥때만 지나도 손이 덜덜 떨리는 나 이니까.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 

다행히 늦지 않았다. 생수 한 병을 사들고 목을  병원으로 들어섰다.


먼저 찌부짜 유방 촬영술을 했다.

검사해 본 사람은 내가 왜 이리 부르는지 알 이다. 그새 체중이 늘어서 인지 아님 선생님의 노련함 인지. 아무튼 작년보다 덜 아.


다음으로 유방 초음파 검사를 했다.

이쪽은 중년층이 주류를 이룬다. 주로 남자들은 비뇨기, 여자들은 유방 검사를 한다. 어두운 검사실에 누워서 만세를 하고 있다 나왔다. 모든 검사를 순조롭게 마쳤다.





이제 왔던 길을 되짚어가기만 하면 된다.

출발 전 화장실은 필수다. 두 시간 이상 버스에 올라타 있어야 하니까. 가능한 쥐어 짤 수 있을 만큼 모든 수분을 배출하고 나선다. 이때부터는 마시는 물도 절제한다. 집으로 가는 길 긴장이 풀려서인지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오전 11시에 시작한 나의 여정은 오후 6시가 되어서야 막을 내렸다.


그때까지 먹은 것이라곤 생수 반 병. 

트레이드마크처럼 볼록 나와 있던 배는 놀랍게도 평평해져 있었다. 바지는 살짝 헐렁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납작해진 배를 만지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배시시 흘러나왔다. 이것이 생시인가 아닌가 했다.


35도가 넘었던 날씨 속 물 반 병으로 버텨서였을까.

입맛도 없었다. 저녁으로 요거트에 견과류를 넣어 먹었다. 검사하며 발랐던 끈적한 겔과 땀이 섞여 씻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씻고 나니 불면증을 느낄 세도 없이 곯아떨어졌다. 아침에 눈이 떠졌다.


일어나자마자 배부터 만져봤다.

납작 배 그대로였다. 얼마 만 다시 만난 배인데. 그대로라니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호르몬 약을 몇 년 정도 복용하니 뱃살이 야금야금 늘어 이만저만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나에게만 일찍 찾아온 갱년기가 한없이 밉고 그랬었다. 거울 앞에 서서  몸을 요리조리 돌려봤다. 뱃살 없는 내가 신기했다.





하지만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납작 배에 대한 감동도 잠시. 본능적으로 배가 고팠다. 그래도 어떻게 얻은 배인데. 혹여 회귀본능할 뱃살이 염려됐다. 어제저녁처럼 간단하게 요구르트에 견과류를 먹었다. 여전히 배가 고팠다. 건강식이라 위안 삼으며 나또를 김에 싸 먹었다. 그 뒤로 미니 다크 초코바를 한 개 해치웠다. 강조하지만 미니 사이즈다. 마지막 입가심으로 카페 라테 믹스도 한 잔 마셔주었다. 이제 책 좀 읽어볼까 책상에 앉았는데 입이 심심했다. 쫀드기 하나 구웠다. 오물대며 책을 읽었고... 졸렸고... 책을 들고 침대로 갔고... 깜박 졸았는데 눈을 뜨니 점심때가 훨씬 지나 있었다. 하루 종일 비가 오니 라면을 먹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점심으로 육개장 사발면쩝쩝댔다. 아침에 먹고 남은 유부초밥 덩이가 있었다. 라면 국물에 적셔 함께 처리했다. 저녁은 누룽지 백숙을 끓였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계속되는 잔기침을 떨쳐버리겠다며 한 그릇 그득 먹어주었다.





정확히 12시간 뒤.

신데렐라 마법이 풀리기라도 한 듯. 나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슬프게도 딱 12시간만 날씬했다. 앞으로 봐도 옆으로 봐도 다시 봉긋해진 배. 두 손으로  아랫배를 잡아 위아래로 흔들어 보았다.


돌아온 뱃살이 속상하고 야속했다. 런데  글을 쓰고 보니  내가 참 많이도 먹었구나 싶다. 살이 돌아올 만도 했다.


시금  납작 배를 경험하기 위해 내일부터라도 다이어트에 돌입해야겠다. 요즘 브런치 북 < 이 죽일 놈의 다이어트> 핫하던데. 그 작가님이 성공했다는 풀떼다이어트에 도전해 봐야겠다. 굶지 않고 먹는 다이어트라니. 샐러드에 달걀 두 개. 하루 상추 50장씩 뜯어먹고 성공적 다이어트 후기로 다시 찾아오련다.


세상의 모든 다이어터들 꼭 승리하시길!







메인 사진 pixabay

본문 사진 Pie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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