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석 Feb 27. 2020

우파니샤드의 지혜

브라만과 아트만

우파니샤드, 이것은 고대 인도의 경전 모음집으로서 직접적으론 힌두교와 불교에, 간접적으로는 중국 도교와 서양 르네상스 시기 스피노자나 쇼펜하우어, 니체 같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기 전에 먼저 읽어야 할 책 중 하나로 우파니샤드를 언급하기도 했다.


우파니샤드의 본격적인 내용을 설명하기에 앞서 우파니샤드가 쓰인 배경을 살펴보자. 고대 인도인들의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키워드는 크게 ‘윤회’와 ‘수행’, ‘다신’이 있다. 고대 인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윤회’하는 세상 속에서 ‘다신’들 중 맞는 이를 섬기며 현세의 복을 바라고, 더 좋은 생을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이 중 우리가 ‘수행’ 끝에 얻는 진리는 무엇인지 고찰한다. 즉, 우파니샤드를 읽는 목적은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궁극적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함이다. 우파니샤드는 그 궁극적 진리를 찾기 위해 끝없이 ‘왜?’를 던진다.


“그것은 이것에서 비롯한다. 그럼 이것은 무엇에서 비롯하는가?”


그리고 그 ‘왜?’의 끝에 우파니샤드는 ‘브라만’을 궁극적 진리라고 보여준다. 그 궁극적 진리인 브라만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네티 네티)것이다. 브라만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즉 자재자이다. 브라만은 스스로 생명을 양성하며, 자재자로서 모든 것에 깃들어 있다. 그리하여 브라만은 모든 것들의 안에 있음과 동시에 가까이 있다. 결국 우파니샤드는 자신에게 있는 이 브라만을 인식하여 결국 모든 존재들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안에서 하나가 되는 환희를 느낀다. 또한 모든 것의 존재로서 불멸성을 얻게 된다. 따라서 우파니샤드는 이러한 브라만을 인식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적인 일이라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브라만을 어떻게 인식할까? 브라만을 인식하기 위해선 내면의 아트만을 인식해야 한다. 아트만의 우리말은 ‘참나’로 불교의 그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불교의 참나는 모든 군더더기를 처넨 후 알게 되는 것이라면 우파니샤드에선 모든 존재를 자신이라 긍정함으로써 ‘아트만’을 인식한다.


우파니샤드는 다양한 버전이 있고 그만큼 아트만과 아트만을 찾는 수행을 표현한 방식 또한 다양하다. 다만 공통적인 흐름은 이런 식이다.

일단은 이름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떠한 이름은 언어에서 나오며 언어는 감각에서 정해진다. 감각은 마음에서 나오며, 마음은 집중함에서 나타난다. 집중은 힘에서부터 나오며, 힘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음식은 물에서 나온다. 물은 열기에서부터 나오고, 열기는 대공(비어있음)에 의지한다. 대공은 기억력에 의존하고, 기억력은 희망에서부터 나온다. 그리고 희망은 생의 호흡에서부터 나오니 즉 호흡, 생명이 곳 아트만이다. 그래서 호흡에 집중하며 명상하고 수행하다 보면 아트만을 찾게 된다.


사실은 위에 열거된 이름, 언어, 감각, 마음, 집중, 힘, 음식, 물, 열기, 대공, 기억력, 희망, 호흡이 모든 것이 아트만이다. 위에서 말했듯 브라만은 모든 것에 깃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호흡이 아트만이라고 하여 아트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하나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수행방법이다. 그래서 우파니샤드의 여러 판본 대부분은 이것이 아트만이라 하고서 스스로 이것이 아트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며 하고 또 다른 저것을 아트만이라 하여 또다시 저것도 아트만이 아니라는 것을 또 다시 깨닫는 과정을 거치며 결국 수행 끝에 스스로 아트만을 찾게끔 한다. 그래서 호흡이 아니라 음식으로서의 아트만에 집중하는 내용도 있고, 마음으로서의 아트만을 집중하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이는 서로 다른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닌 같은 맥락,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 ‘맥락’, 즉 수행의 전체적인 성격, ‘모든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옴’이다.


수행 끝에 아트만을 인식하면 푸르샨을 인식하게 된다. 푸르샨이란 진리를 뜻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아트만(참나)으로 푸르샨(진리)을 인식하면 그 진리가 결국 자기 자신임을 깨닫고 브라만을 인식한다. 브라만을 인식하면 미워하지 않고, 환희하며, 즐거움을 느끼고 불멸의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불멸의 상태는 모크샤 즉 우리가 아는 해탈에 해당한다.


우파니샤드엔 이러한 브라만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브라만에 집중하지 않는 기존의 수행자들, 종교인들을 비판한다. 제식에만 집중하다 보니 재물에 집착하며, 곳 고정된 가치에 묶여있다는 것이 우파니샤드가 이들을 비판하는  요소이다. 그래서 수행을 한다 해도 해탈을 하지 않고 윤회에 집중하느라 잘해 봐야 인간이며 결국 축생의 삶을 면치 못한다고 한다.


이러한 기존의 지혜들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불이원론이라는 우파니샤드의 또 다른 특징이 도드라진다. 불이원론이란, 상술했던 브라만의 이것이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인 모순적인 진리 계념을 설명하기 위해 나타난 서술방식이다. 한번 예시를 들어 보겠다.



‘지혜가 아닌 것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들어간다. 지혜에 빠진 사람들은 그보다 더욱 심한 어둠으로 들어간다. 지혜로 얻는 것과 지혜가 아닌 것으로 얻는 것은 각각 다른 것이라 말한다. 지혜와 지혜가 아닌 것, 이 두 가지를 모두 함께 하는 사람, 근 지혜가 아닌 것으로 죽음을 넘어서고 지혜로 불사의 상태를 얻는다.’



이와 같이 우파니샤드에선 이것과 저것을 부정하는 동시에 긍정하면서 그 너머에 있는 참된 지혜를 강조한다.

하지만 우파니샤드의 이러한 특수한 성격은 시간이 흐르며 기존 인도 사상과 결합한다. 현대에서도 공감할 만한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부분이 많이 쓰인 초기 판본의 요소는 옅어지고, 후기로 갈수록 수행과 고행을 강조하며, 지혜의 신비성과 특별함을 주로 서술하며 일명 ‘종교성’을 띤다. 즉 우파니샤드는 분명 르네상스 시기 급진적 철학자들을 반하게 할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브라만교, 힌두교의 일부 즉 종교서적으로서 가진 태생적인 한계를 어쩔 수는 없었다.


브라만을 깨달은 아트만의 상태에 다다랐을 때, 그 진리에 대해 ‘신조차 건드리지 못한다.’는 문구는 아트만의 대단함을 상징하는 말이지만 힌두교 사제들은 이 문구를 불가촉천민이나 하급 계층들이 아트만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어 계층 탄압의 빌미가 되었으며 실제로 실수로 하층 계급이 이 우파니샤드를 비롯한 경전을 보았을 시 그 눈을 뽑아버렸다.


우파니샤드 초반에 등장하는 ‘버림으로써 기쁨을 얻어라’ ‘신은 모든 것에 속한다.’는 말을 제외하면 개개인간 상호 도덕을 말한 부분이 적고 주가 되지 않기 때문에, 권력자의 탄압이나 물질적인 횡포를 제어할 강한 사상적 토대가 없었다. 이는 수행에 집중한 고대 인도 문화에서 나타난 부작용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은 평등의 종교, 불교의 탄생을 예기하고 있다.



물론 우파니사드 하나 만으로 모든 힌두교를 이해할 순 없다.  하물며 인도 전체의 문화를 이해할 순 없다. 그러나 우파니샤드가 지닌 진리에 대한 고찰은 지금 보아도 그 논리는 허점을 찾기 힘들 만큼 잘 짜여 있으며, 우파니샤드의 그 색깔을 이해했을 때 이는 우파니샤드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상과 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어주는 유용한 열쇠가 되어준다. 따라서 우파니샤드, 기회가 되면 읽어 보길 추천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