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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석 Mar 01. 2020

인식의 선물 1

객관과 주관 그리고 나

주관성이라 해도 일말의 객관성을 포함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객관성은 가장 내적인 나, 즉 주관성에 의탁해 있다. 사람은 무언가를 인식할 때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를 추상적인 개념으로 정의한다. 가장 기초적인 감각은 육채의 영역이며 육채야 말로 가장 주관적인 부분이다. 어떤 회의주의도 생각하는 나 자신을 부정하지 못하듯이 말이다. 우리는 감각이 불안정한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감각에 파도 속에서 인생을 살아간다. 따라서 감각은 의심의 대상이 아닌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이고 상황이다. 주관성의 발산지는 우리의 감각이다. 감각에서 주관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사고적인 인식 중 주관성을 띄는 인간의 기질이 직관이라면 객관성을 띄게 하는 인간의 기질로는 이성이 있다. 직관의 인상에 대해 인식하게 되면 이성은 그 대상을 다른 대상과 분리시킨다. 그리고 그 인상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정의한다. 이렇게 정의된 개념들을 다시금 되풀이하여 사고하는 과정을 우리는 이성의 작용이라고 부른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인 이성은 주관성 속에서 객관성을 향해 달려간다. 이성은 우리가 종이 위에 그려진 원을 바라볼 때 불완전할지도 모르는 그려진 원형이 아니라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원을 사고하고, 그리고 그 개념을 환원해 현실로 재현시켜 ‘거리가 일정한 평면 위의 점들의 집합’이라는 명제를 도출할 수 있게 한다. 이성의 진정한 능력은 일종의 심리적 감각기관으로 추상적 개념을 상상하는 대 있다. 감각에 대응하는 뇌 난쟁이가 있는 것처럼 인식의 난쟁이가 우리 정신 속에 있다.


이성은 추상적 개념을 반복해서 제 개념화시킨다. 기하학이나 수학, 논리학이 순수한 이성의 영역인데 이 학문들은 추상적 개념을 다시 또 다른 추상적인 개념으로 환원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성이 스스로 반성하며 한 개념을 하나의 관념으로 박제할 시 그것이 바로 지식이 된다. 지식은 그 자체로 객관적 세계에 대한 욕망을 부추긴다. 모든 것을 숫자로 해석하고자 한 피타고라스와 음과 양의 조합으로 만물을 설명하고자 한 중국의 역경이 그 욕망을 향한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러나 세계는 숫자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이성을 쓰지는 않는다. 모든 감각기관은 너무 자주 쓰다 보면 피로를 호소한다. 오감에 강한 자극을 주면 처음엔 강렬한 통증을 일으키다가 마비된다. 이성 역시  지속적으로 객관적이려고 하다 보면 일이 더 수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어려움을 느낀다. 이성은 판단의 작은 부분만을 차지할 뿐이다. 이성의 기능은 추상적인 개념의 분리 이후에야 일어나기 때문에 한 번에 단 한 가지만 기능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인상이 지닌 연속적인 사건에 이성의 판단은 현실과의 괴리가 생겨나게 된다. 몇 가지 예외를 빼면 사람이 무언가를 의도할 때 또는 행동할 때 이성은 그 방향성이 될 수 있지만 주체로서 활약할 수 없다. 그러니 어떠한 행동의 당위성은 이성이 아닌 관념에 있게 된다. 이성으로 판단하고 지성에 근거하여 행동하더라도 한 개개인은 그 지성의 화신이 될 순 없으며 특정한 부류의 직관만이 이성을 잠깐 흉내네기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아무리 이성을 사용해 판단을 내리더라도 인간으로서 무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성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노골적이다. 위에서 예를 들었던 역경이나 피타고라스의 사상이 아니더라도 종교나 사상, 더 작게 들어가면 애인에게 사랑을 증명해 달라는 행위 속에서도 객관성을 향한 욕망을 엿볼 수 있다. 개인은 늘 주관적이고 수많은 요소를 기반 삼아 행동한다.


이성을 사용해 학문을 교육한다 하여도 한계가 있다. 앞서 말했듯 이성은 도구이기 때문에, 그 능숙함 역시 홀로서 인간을 규정하지 못한다. 인격을 단어로 규정하는 것 역시 인격을 표현하기 위한 방도일 뿐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과 그로 인한 객관성, 단어와 언어는 비유하자면 인격이란 사과가 있을 때 이성은 그 사과의 껍질이다. 사과가 껍질로만 이뤄지지 않았듯 인격 역시 단어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단어가 없으니 단위도 없고 단위가 없으니 논리가 부여되지 않는다. 어떠한 논리에 따르지 않으니 특정한 의미를 부여받지 않는다. 만약 의미가 있게 된다면 인격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게 되는 수밖에 없다.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듯 해 보이는 점이 객관적 개념들과 비슷하지만, 그 존재에 어떠한 외부적 당위성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굳이 표현하자면 인격 내 순환 논증이 무한한 동력을 주는 것이다.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는 당위성이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그로서 나라는 인격은 생각 이전에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인격을 인지하기 위해선 인격이 있은 후 그 파편을 이성으로서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사실 모든 인식 과정이 전부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있는 것은 물리적 인간으로서의 행동과 감각이다. 어떤 방향성에 따라 감각이 주관적으로 왜곡되어 인지하지만 그 방향성 역시 원초적인 감각에 따라 결정된다. 정확히 따지자면 감각이 먼저 있었고, 그 감각이 심층적으로 쌓이고서 행동으로 발상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우리를 만든다. 인식하지 못하는 온전한 나는 그 속성 때문에 홀로 선 인지될 수 없다. 행동을 하며 외부와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비로소 인식하는 나, 즉 자아와 정체성이 파생된다. 이 행동은 개인의 주관성과 외부의 객관성이 부딪히는 그 경계를 만든다. 그러므로 행동은 한 개인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큰 범주이다. 서로 절대 상호 할 수 없는 나와 네가 행동 속에서 변화하고 그 경계를 허문다. 따라서 행동이 곳 자아 그 자체다.


무엇인가 직접 실천할 때 그 내부의 당위성은 실천하는 행동 바깥에서 나오지 않고, 행동함 자체에서 나온다. 행동이 자아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고로 행동은 행동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단일한 행동은 하나의 자아와 대응하거나 포함한다. 그로서 한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자아를 가지는 것 역시 행동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이때 이성은 행동과 외부의 괴리를 찾아 고찰하는 역할을 한다. 물질세계와 우리가 원하는 세계는 다르기 때문에 행동은 필연적으로 이성을 불러일으킨다. 원함, 욕구를 잃는 것은 자체적 추진력을 없애고, 행동을 없애고 자아를 없앤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인 이상, 몸이 있는 이상 자아를 없앨 수 없다. 그러므로 행동은 끝없이 객관과 반목한다. 이성은 고찰 끝에 행동과 객관적 외부 사이에 오류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을 부적절하다고 판단한다. 이성은 그 영향에 속해 있으면서 무언가를 부정하는 반항아인 것이다. 그러나 행동은 이성의 고찰에 대해 행동을 오염시키는 것으로 여긴다. 이는 이성을 향한 행동의 방어체계라고 비유할 수 있다. 행동은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행동하는 그 과정 자체가 이미 마땅하다는 것을 전제 하에 두며 그리고 이것이 행동이 있기 위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미 전재되어 있는 행동은 곳 그 자체로 그 행동의 의미이다. 행동이 있고 나서야 자아실현이라는 바탕이 생겨나게 된다. 이로서 행동은 또 다른 행동을 낳기 위한 행동 이후의 당위성을 깔게 된다. 당위성은 또 다른 행동이 되며, 그렇게 이성이나 고찰이 끼어들지 못하는 행동의 연쇄가 이뤄진다. 이러한 연쇄 속에서 해야 하는 것은 응당 진심으로 행동하는 일일 뿐이다. 이미 그 자체로 옳은데 더 생각할 것이 없다. 사고와 행동을 분리시키는 시도는 이미 자아에게 있어 존재의 근거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행위가 된다. 행동에 있어 그 자체를 되돌아보려는 생각은 이미 형성한 정체성을 부정하게 되며 피로감과 동시에 불쾌감, 거부감,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기에 의미와 행동이 같이 갈 때 언어는 불경한 것이 된다. 행동 중 사고를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행동이 멈추고, 행동 안에 어색함을 불러일으킨다. 숨 쉬는 것을 생각하면 숨 쉬는 게 어색해지는 것이 그렇듯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행동하는 모든 것들에도 생각이 중간에 들어가면 그 움직임이 멈추게 되며 말 그대로 ‘어색’해진다. 다른 말로 인위적으로 보인다. 행동에 아무런 사고와 이성 작용이 없을 때 그 행동은 순수하며, 그런 행동을 자주 하는 사람은 순수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순수함은 불쾌감. 거부감, 공포를 일으키지 않는다. 이와 같은 작용을 윤리적인 측면으로 옮겨봤을 때 고찰은 나쁜 것이라 평가받게 된다. 이성의 긍정성을 계속해서 인지하지 못했을 때 고찰의 합리성 유무와 관계없이 고찰은 불경한 것으로 간주되며 행동은 고찰에 대한 공격성을 띤다.

행동은 공격적이다.


한번 예를 들어 보자. 어느 아이가 선생님에게 왜 자신이 학교 청소를 도와야 되는지 물어본다면 그 아이는 그 자체로 실례를 하게 된다. 아마 선생님은 속으로 어째서 이유가 필요하지?라고 되물어 볼 것이다. 대신 선생님들은 보통 이렇게 말한다. 다들 하니까, 모두를 위해, 또는 우리가 쓰는 물건이니까. 이런 대답은 아이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 오히려 질문만 더 늘어난다. 여기서 아이가 마음을 접고 다시 청소하러 돌아간다면 그 아이는 기쁘게도 어떤 이유와 상관없는 행동, 즉 그 자체로 마땅한 행동으로 돌아가게 되며 다시금 올바른 아이가 된다. 하지만 아이가 계속해서 왜 다들 하는데 나까지 해야 하는지, 또는 왜 모두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지 또는 우리가 쓰는 물건인데 선생님이나 교장선생님은 청소를 하지 않는지 물어본다면, 그 아이는 불경해진다. 감히 행동에 반기를 들은 예의 없는 반항아이고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졌다. 왜냐면 응당 그래야 할 것을 물어봤으니까. 애초에 학생이면 해야 할 도리를 거절하는 반(反) 학생, 학생이면서 학생이고 싶지 않아 하는 가여운 인간이다. 이러한 학생은 교정받아 마땅하다. 만약 당신이 권위주의를 싫어하고 학생의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선생이 나쁘고, 학생은 아무 잘못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혹은 좀 보수적이거나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선생이 역할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동중심의 사고 앞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함정에 빠진 것이다. 옳고 그름보다는 선생의 즉각적인 판단을 보아야 한다. 선생은 학생의 질문을 판단하지 않고, 질문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판단한 것이다.


또 다른 예시이다. 한 학생이 자신은 공부를 하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선생님이 와서 학생에게 공부하라며 다그친다. 학생에게 있어 내가 뭘 더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불쾌하다. 나는 이대로 완벽한데 왜 더 무슨 공부가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스스로 일깨워 가면 될 텐데 말이다. 학생은 스스로 마땅히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생이 학생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선생은 바른 선생이고 된 선생이다. 선생이 계속 학생을 핀잔하면 선생은 꼰대가 되고 꽉 막힌 녀석이 된다. 이 예시에서 학생과 선생, 누가 옳은가? 그건 딱히 상관없다. 왜냐면 앞서 말한 예시의 사람들은 모두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생각하는 선에 충실하고 용기 있다. 그들은 행동함에 있어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오히려 자신이 더 자랑스럽다. 학생이 청소하도록 다그치지 않는 선생은 유약하고 학생에게 해로운 선생이고, 선생의 잔소리에 저항하지 않는 학생들은 스스로를 묶는 겁쟁이, 노예이다. 그들 스스로 바뀌기 전까지 그들을 설득시킬 방법은 없다. 행동은 그 내용물이 어떻든 외부의 시선에서 봤을 때  공격적이다. 이러한 공격성은 용기, 신념으로 불릴 수 있겠지만 우리가 작은 개인으로서 마주 볼 때는 대부분 고집과 독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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