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를 공격하는 행동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실현이다. 행동으로 이 세계 안에 자신을 구축하는 한편 이성과 내재된 모순이 타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고로 자기 자신을 향한 행동은 자아 안의 타자를 생성하며 이는 스스로를 향한 공격성, 즉 내적 갈등, 모순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항상 이렇게 행동이 공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행동의 공격성은 자아가 아닌 행동 자체의 외물에 한해서만 나타는 것이다. 만약 행동 안의 또 다른 하위 행동이 있을 시 그러한 하위 행동은 상위 행동에 속한 복사본이며, 인지하기 어려운 나의 일부로 느껴진다. 고로 상위 행동과 하위 행동이 유사할수록 그 행동 간 잠재된 공격성은 줄어든다.
이러한 특징으로 스스로를 향해 공격성을 드러낼 수 있다. 하지만 엄연히 다른 계체임에도 같은 상위 행동 속에 있다면 나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행동이 타인에게 향할 때 타자를 자아와 분리시키는 한편 동시에 그 타자를 자아 안에 포섭한다. 행동에 있어서 불편한 것은 소거해야 할 타자이고 편안한 것은 나의 요소에 포함되는 것, 나라는 정체성이다. 만약 우리가 타자라고 인식한 대상이 편안하게 연결되었을 때 서로 같은 행동 속에서 타자는 더 이상 타자가 되지 않고 나의 일부처럼 생각하게 된다. 내 제화된 타자는 서로 행동하는 주체이면서 하나인 정체성을 가지게 되고, 이로서 사회적 정체성이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행동의 특징은 다수에게 긍정된 상위 행동, 즉 문화와 결합하여 윤리와 행동규범의 근간을 이룬다.
이러한 내제화된 타자는 보통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동물이나 심지어 무생물에게도 내제화가 이뤄지며 어떤 면에선 인간보다 더 내제화하기 쉽다. 동물이나 무생물은 인간이 하는 행동과 동일하다고 인식할 이성적 근거가 없다. (개나 코끼리, 원숭이 같은 지능 높은 생물은 재외 한다.) 때문에 이미 이해했다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의 일부처럼 느끼더라도 실제로 그 동물, 무생물과 실제로 어떤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시각으로서만 이뤄진 일방적 내제화는 실질적 불균형, 즉 오해가 일어난다. 우화를 예로 들어 보겠다. 소를 선물 받은 부자가 매우 기뻐하며 잘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리하여 부자는 소에게 자신이 먹던 닭튀김을 먹였다. 하지만 소는 부자가 기뻐하는 것도, 닭튀김도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닭튀김을 먹은 후 처음 먹은 고기의 맛에 놀라 그만 부자를 치어 죽여 버렸다. 이러한 부자의 오류가 바로 일방적 내제화로 인한 오해이다.
이러한 오해는 사실 상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일어나게 되어 있다. 왜냐면 엄연히 다른 존재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만약 나 자신을 복사해 내 눈 앞에 가져다 놓는다 해도 좌표 상 차이와 그로 인한 시청각적 차이가 생기며 고로 완벽하게 동일한 존재란 있을 수 없다. 하나 행동은 타자를 타자의 행동에서 드러난 단편적인 면으로서만 해석한다. 하지만 타자는-스스로 행동을 할 수 있는 타자는 복합적인 구상물이며 단편적 해석은 오해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상위 행동으로 내제화되어 있다는 것은 단편적 동일함에서 비롯된 복합적 타자를 향한 기대감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기대는 그 행동이 내적 동기 없이 [행동=인간] 그 자체로서 이뤄지길 희망한다.
만약 당신이 선생님이라면 단순히 그런 역할을 연기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당신은 영혼부터가 좋은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 집에 혼자 있을 때도 학생에게 부끄러울 행동은 하면 안 된다. 친절하다면 인간 자체가 친절하길 바란다. 무례한 사람은 애초에 그런 사람이고 괴팍한 사람은 그 인간이 괴팍한 것이다. 친절하던 중 한번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다면 그는 친절한 것이 아니다. 친절하지 않고 악덕을 품고 감추고 있던 것뿐인 인간이다. 그렇기에 사생활에 대해서도 무감각하다. 내 앞에 보이는 이 모습이 진실되다면 굳이 감출 것이 없다. 무언가 드러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숨기는 악덕을 발견한 것이며 애초에 드러내 보였어야 할 악덕인 것이다.
자아에게 타자는 우상이다.
다면적 인간이 단면적 기대를 받는 것은 충족되지 못하는 조건이며 부조리이다. 그러므로 타인을 향한 행동은 현실과 사고의 부조리 속에서 그 행동의 위치가 지각된다. 개인의 행동은 이성이 행동을 지각하는 것만으로도 위협받는 것처럼 행동으로서 정의된 개인의 정체성은 부조리를 행함으로, 또 그 부조리를 당함으로써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을 구체화시키지만 구체화된 만큼 그 정체성은 위태롭고 흐려지게 된다. 때문에 기대자로서의 인격은 인간과 인간 속에서 나타나는 부조리가 최대한 인식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자신의 모순적인 동기들을 발견했을 시 자아로서의 위험으로 받아들이고 잊으려 억압하게 된다.
강력하게 단언하건대 사회는 이러한 오류로 생겨난 기대와 책임으로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개인은 이런 구조 속 기대는 그대로 인간은 하나의 인격체에서 사회적 대상으로 변하며 그에 대한 자가적인 원인과 결과를 요구받게 된다. 이러한 요구는 행동으로서 정해진 개인의 정체성을 구축한다. 이런 구조와 맞지 않는 자신을 나 안의 타자로 만들어서까지 사회구조적인 정체성을 새우게 된다.
이런 점에서 행동은 거칠게 변한다. 자기가 부정된다는 두려움 속에서 우아하게 승화될 수 있는 인간의 성질을 제거하고 악으로 규정한다. 또한 이러한 성질을 발견하지 않기 위하여 행동에 대한 언어적 해체를 견지한다. 내면적 동기를 무시하고 행위 자체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행동에 어떠한 단어를 부여하다가는 그 행동은 사라지고 개념만이 남는다.
파괴적인 존재
그리하여 관계적 행동으로서 만들어진 사회적 정체성은 필연적인 모순 속에서 부정되고 해체된다. 그 정체성은 자신이 사라질 위기를 겪는 순간, 스스로에 대한 이중 부정으로 그동안 부정해오던 것들에 대한 그러함, 즉 긍정할 수 있는 행동으로 인정한다. 행동의 부조리를 주인과 손님의 관계처럼 어쩔 수 없이 인용하는 순간 부조리는 반란을 일으킨다. 부정이 부정으로서 일단 행위되는 순간 가치의 전도가 발생한다.
이러한 이중부정은 자기 자신에게 근거한 사유로 자신의 손을 밟고 뛰는 것과 같이 정석적인 타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즉 다중 부정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원형이 부정의 부정이 되거나 부정이 또 다른 원형이 되는 등 한 행동 속에서 가치의 전도가 일어날 뿐이다. 하나 이러한 가지의 전도만으로도 행동이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이에 비롯된 청량감은 깨달음이나 구원에 비견되며 이 또한 행동의 또 다른 특징으로서 나타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