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석 Mar 01. 2020

인식의 선물 2.5

행동과 퇴폐

행동의 관점에선 개인을 단편적으로 바라본다. 그것이 됨과 동시에 더 이상의 다면적인 이해는 없으며, 실질적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복합적인 단계들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런 면에서 필연적으로 사회적 행동은 인간의 교육과 배움을 기적처럼 여긴다. 교육의 끝에는 마치 구원과도 같은 깨달음, 정체성의 변화를 기대한다. 그 깨달음은 개인적인 인격의 도야인 동시에 사회적 처새, 기술의 터득과도 같은 영역에서 이루어지며 어떠한 깨달음이라도 그저 쓰고 나서 버려지는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깨달음, 눈에 보이는 기적은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영혼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척도로 쓰이게 된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 기대감은 그 자체로 사회와 그 사회적 개체 간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된다. 하나 이런 교육에 대한 시선은 또 다른 행동으로서 개인이 견디기 힘든 부조리한 과정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사회적 행동 속에서 개인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사회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깨달음을 얻고자 자기 자신을 타자화한다.


이러한 사회 가치의 개인적인 전도는 퇴폐의 과정이다. 퇴폐는 기존에 불필요하고 부정하다 여겨지던 것을 설득과 반성 없이 행하는 것. 또는 그러하다고 인식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물이 유행하는 것이 퇴폐문화이다. 개인이 대상(사회)의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은, 사회를 퇴폐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하나 대상(사회)에겐 자신을 퇴폐라고 규정하는 개인이야 말로 퇴폐이다. 개인이 대상에게 순응하는 것은 개인의 퇴폐이고, 대상이 개인에 의해 바뀌어지는 것은 대상의 퇴폐이다.


상호 적대로 인한 상호 간 퇴폐화로 인해, 타자의 모든 행동은 퇴폐이다. 퇴폐는 타자다. 타문화는 퇴폐문화다. 퇴폐문화에 빠지는 것은 나의 타자됨이며, 자아 잃음이다. 개인의 퇴폐는 자가 부정적 우울이며, 환락이다. 빈자가 애써 부자의 문화를 따라 하는 것, 황인이 백인을 따라 하는 것, 뚱이가 스펀지밥을 따라 하는 것은 그 기저에 자기부정적 파괴성과 추락의 쾌락과 맞닿아 있다. 즉 주류문화가 퇴폐문화에 잠식되는 것 또한 일종의 사회적 살해이다.

일방통행 파놉티콘


가치 전도에 성공한 퇴폐문화가 주류문화가 되는 분기점은 책임이다. 이성을 사용하여 타자를 내제화하듯 퇴폐는 책임을 따라 주류가 된다. 그러나 외부의 시선에서 그 자정작용이 완전하지 않으면 그저 퇴폐문화라고 불린다. 그러나 책임이란, 객관적 합치와 합의로 개개인의 행동을 동일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책임은 개인에게 있어 또 다른 퇴폐이다. 근본적인 불균형이 제거되지 않고서는 이러한 퇴폐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바른 눈으로 행동과 현실의 불균형을 인정하고 났을 때야 비로소 살아날 수 있고,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정체성의 오해는 깨닫고 버린다고 하여도 버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오해는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이는 것만큼 필연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타고나기를 행동하도록 태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의 오해를 거새하거나 반대로 숭배하는 태도를 취해선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선천적인 힘을 이용해 공격적인 자아실현-세계로서의 확장이 필요하다. 만약 이러한 사회 구조적 오류를 없애기 위해 사회 구조 자체를 없애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사회를 타자로 만들고 이에 대한 오해를 범하는 샘이다. 사회 구조를 없애더라도 결국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러한 오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 우리는 이러한 것을 인식하는 것만은 가능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