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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석 Mar 01. 2020

인식의 선물 3

합일과 없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감각에 의해 늘 새로운 정보를 접한다. 새로운 정보는 또 다른 외부로서 내 인식 과정을 일깨운다.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상상, 표상, 의지와 같은 인식적 현상들은 나와 타자를 규정한다. 나에게 하여금 이것은 알 수 없겠다, 또는 저것은 내가 알고 있다는 외부적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외부를 향한 도전은 필히 격동하게 되며 감각의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사람의 희로애락은 결국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그 뿌리-나와 타자를 분리시켜 생각하는 부조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희로애락은 또다시 인식을 왜곡시킨다. 내부적 인식에 또 다른 모순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타자에게 자아를 굴복시키거나 자아로서 타자를 점령 캐 하는 공격적인 행위로 이어진다. 하지만 모순에서 비롯된 행동이 낳는 것은 끝이 없는 힘의 소모(고통) 혹은 당위성의 상실(허무함)뿐이다. 원천적으로 이는 감각의 모순으로 생겨난 것이므로 그 오류를 알아차렸을 때 아무것도 아닌 무언가로 변해버린다. 그래서 행동으로서 모순은 감각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며 마치 허깨비에 허끼 비를 더하듯 모순을 더 심화하게 되는 행위를 한다. 이것이 바로 집착이다.


집착은 분리와 해체로 벌어진 갈등과 모순을 더욱더 심한 분리와 해체로 해결하려 한다. 앞에서 말한 굴복과 정복을 반복하며 쳇바퀴 돌듯 갈등을 더 심화시킨다. 이러한 외곡은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서 멀어지게 할 뿐이며 대외적으로는 갈등과 다툼, 내부적으로는 분노와 우울함을 일으킨다. 만약 맽고 끊음이 있는 물질에 관한 갈등일 시 그나마 그 물질이 사라졌을 때 자연히 사라질 수 있겠지만 정신적인 갈등일 시 이러한 갈등은 끝을 볼 수 없다.

누구의 발일까?


이러한 갈등과 부조리는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면서 해소할 수 있다. 온전히 나인 것이나 나와 비슷한 것은 인지하기 어렵다. 우리의 인식을 자아와 타자로 나눌 수 있지만 생물학적-심리적으로 인식하는 나와 내가 의식하며 생각하는 ‘나’는 서로 다르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나는 내가 규정할 수 없고, 의식할 수도 없다. 내 의식의 나는 조작 가능하며 자아를 성찰할 때마다 달라진다. 그리하여 무엇을 의식하며, 무엇이 나의 청사진을 그리느냐에 대해 그 근원을 찾아 올라가다 보면 내가 인지할 수 없던 무의식의 나를 발견한다. 그것이 가장 내적인 나이다. 내적인 나는 인식할 수 없으며, 그것이 무엇이 아니라는 것만으로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가장 온전한 나 인 것일까?


타자가 우리의 감각 속에 들어오면 그제야 타자를 인식한다. 우리는 타자는 인지할 수 없는 외부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타자가 인식된다는 것은 타자가 우리의 관념의 손에 닿는 장소에 있다는 뜻이다. 내가 인식하는 타자는 나의 감각에 의존해 내게 형상한다. 즉 모든 인식되는 타자는 부분적으로 나이다. 하나 내적인 나는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인식되는 것은 부분적으로 나인 동시에 부분적으로 타자이다. 그리하여 나라는 것은 결국 타자에 의존하며 또 인식 속의 타자 또한 나에 의존한다. 그 안에 있는 ‘나’라는 의식적 자아는 타자와 나 사이에 있는 부조리적인 분화이며 신체의 욕구와 이성의 한계로 나타난 산물이다. 하지만 이 욕심 또한 ‘나’이고 또 그것이 인식되는 이상 타자이도 하다.


내가 타자라고 인식하는 것은 나에게서 비롯하며, 또한 나 또한 타자이기도 하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내게서 일어나는 자극들과 외부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에 대한 범견적인 인식이 가능하게 된다. 범견적인 인식은 자아 내부를 향한 거대한 용서로서 나의 자극과 정념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로서 나와 타자를 부정하는 동시에 긍정하게 되며, 모든 것에 멀리 떨어지는 동시에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감각적 충만함과 의미없는 색들의 나열


육체의 고통이나 심리적 우울, 또는 욕망의 좌절 등이 생겨나는 것은 아무리 인식하더라도 막을 수 없다. 심리학과 뇌 과학이 발달한 지금 시대에 인식론적 고찰은 흥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수 있다. 개인의 인식은 대외적으로는 무능하다. 그러나 내가 인식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인식하는지-즉 인식을 인식하게 됐을 때 감정의 연쇄적인 외곡과 이로 인한 집착, 갈등을 예방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발견한 인식론의 선물이다.




추가로-이제는 불교의 명상 또한 마음 챙김 명상이라 하여 심리학 쪽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본래 깨달음은 달이고 문자는 손가락이라 하여 손가락이 아닌 달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현대의 과학적 방법론이 있다면 깨달음에 달하는 최적의 방법을 찾는 것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비유하자면 전에는 방향만 가리켰다면 이제는 좌표까지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아니면 아예 깨닫는 알약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 그렇게 되면 갈등이 사라질까? 글쎄다. 서민들이 깨달을까 두려워 계급을 나누고 책을 보면 눈을 뽑아버리던 것이 카스트이고 계급사회인데, 그리고 그게 불과 백 년 전쯤 일인데 말이다. 기술은 기술대로, 인간은 또 인간대로 노력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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