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라는 단어는 어떤 입장에선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모든 행위이다. 어떤 입장에선 공부는 무언가를 능숙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의미는 둘이지만 발음은 하나다. 그래서 시키는 쪽에서 ‘인생을 위한 행위’로서 공부를 하라고 말했을 때, 받아들이는 쪽에서 ‘능숙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공부라고 생각한다면 비록 선의의 말이었을 지라도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다.
‘내가 더 공부가 필요하다면 아직 내가 미숙하다는 뜻인데, 저 사람은 나를 아직 미숙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저 사람에게 얕보였다. 한 마디 따끔하게 해서 혼을 내줘야지’
그렇게 싸움이 시작한다. ‘공부’라는 단어의 의미가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갈등을 유발하는 단어는 공부 말고도 많다. 노력, 직장, 일, 스펙, 돈, 법, 애국심 등등 다면적인 의미를 지닌 이 단어들 속에서 어느 쪽 의미가 단어에 장착되느냐에 따라 누가 나쁘고 누가 착한지 정해진다.
‘나 공부 안 해요.’ ‘노력은 쓸모없어요.’ ‘직장을 바꿀 거예요.’ ‘일 하기 싫어요.’ ‘스펙 쌓기는 의미 없어’ ‘돈이 많을수록, 법 없이 살 수 있다.’ ‘애국심은 개인의 소거’ 등등.
독자 여러분은 이 문장들이 어떻게 읽히는가? 하나하나 깊은 화두가 될 만한 문장들이고,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이렇듯 언어의 의미는 가변적이며 혼란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을 한 사람의 상황과 의도를 따라 그 의미가 어떤지 알 수 있는데, 이런 능력을 ‘눈치’라고 부른다.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언어의 특징을 ‘언어 게임’이라고 불렀다.
언어 게임을 아주아주 단순하게 표현하면 이러하다. 우리는 모든 단어와 문장을 읽을 때, 또 말을 하고 들을 때 그 진의가 어떤지 알아차리기 위한 ‘눈치 게임’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언어 게임은 알아맞히기 게임에서 멈추지 않고 단어에 내가 원하는 의미를 먼저 끼워 넣는 선착순 게임이기도 하다.
현실에 언어를 끼워넣다.
이슈가 됐던 언어 게임인 ‘노력’을 예로 들어 보자.기성세대들은 노력을 권장하고자 했다. 그들에게 노력이란 단어는 삶을 유지하고 또한 꿈을 이루게 만들며, 원하는 바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의 행위 즉 힌두교의 고행 같은 인생 만능 도구로 사용되었다. 즉 기성세대의 노력은 마음가짐과 그 결실, 또한 그 행위에 대한 전반적인 요소 모든 것을 총칭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권장하고 싶은 모든 요소들을 노력이라는 단어에 넣어 젊은 세대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언어 게임에서 기성세대의 전략은 먹혀들지 않았다. 젊은 세대들은 노력에 치를 떨었는데, 그들에게 노력이란 그저 고생의 다른 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즉 기성세대의 노력이 행하는 모습을 그려넨 동사라면 젊은 세대의 노력은 어떤 상태를 나타네는 형용사였다. 때문에 기성세대의 ‘노력해라’는 말은 젊은 세대가 가진 언어의 시각에서는 ‘불행해져라’는 의미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언어 게임을 하고 있고 언어 게임이 하나 끝날 때마다 언어는 사전적 정의에서 한 발짝 씩 멀어져 간다. 서로 간 갈등이 심화되어가는 지금 이러한 그 언어 게임의 구조를 이해하고 나면 조금 더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언어 게임은 서로의 가치를 훼손하면서 단어의 의미를 부여잡는 제로섬 게임이지만, 서로를 이해하며 가치와 의미를 알아 가는 퍼즐게임 또한 언어 게임이다. 옛말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승리라고 한다.언어 게임에서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러한 언어 게임의 오소를 알고 하는지 모르고 하는지, 멀쩡했던 단어가 혐오표현이 되고 이 단어를 쓰지 말라느니 뭐하다느니 그 의미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사회가 다원화되고 세대 간, 성별 간 갈등이 점점 심해지는 이때에 단어와 단어로, 언어 게임을 제로섬 게임으로서, 또 다른 갈등의 요소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의 진의를 깨닫고 배려해 주는 협동 게임으로서 승리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