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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석 Mar 17. 2020

페미니즘, 사상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

가장 활발한 이론에게 말하다.

페미니즘의 이론은 합리적이나 실제론 잡음이 멈추질 않는다. 오히려 젠더 분쟁이라고 갈등이 심해지는 이 상황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평등사회로 가기 이전의 성장통인지, 아니면 아니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상이었던 건지. 하아 이게 왜 안되지 싶다. 

나는 페미니즘과 사회의 충돌을 볼 때 페미니즘의 전유에 대해 주목해보곤 한다. 생각해보면 성공한 페미니즘은 선진국 상류층 여성의 전유물이다. 중하류층으로 내려갈수록 페미니즘은 건강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이미 타 영역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평등의 영역이 아닌 너 아니면 나의 정치적 투쟁으로 바뀐다. 아예 최하류 층의 영역에선 페미니즘은 아예 선택지에 끼워지지도 못한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 이미 자유로워 보이는 상류층 여성은 페미니즘이라 하여 더 많은 자유를 원하고,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힌 중산층 여성들은 페미니즘의 실현을 위해 급진적 성향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정작 진짜 페미니즘이 필요한 최하층 여성은 관심 밖에 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당연하다. 시각을 살짝 바꿔보면 이해가 쉽다. 페미니즘으로 인해 이들이 평등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평등을 누릴 상황이 됐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생겨난 것이라고. 즉 페미니즘은 인권과 경제가 발전한 그 첨단에 발견되는 현상인 것이다. 이는 그저 페미니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사상이든 현실사회에서 생겨나고 실현되기 위해선 그 사상이 윤리적이고 합리적인가에 상관없이 그 사회가 처한 경제, 정치, 심지어 지리와 기후 같은 원초적인 부분까지도 적절하게 받춰져야 한다.

민주주의를 예로 들어보겠다. 민주주의가 자생하기 위해선 유기적으로 발전된 자본주의와 고양된 시민의식이 선재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원시적이나마 민주주의가 생겨난 이유는 그리스의 지역적 특성이 때문이다. 본디 그리스는 거대한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다. 산새가 험한  지중해 연안 산골 사이사이 자리 잡은 폴리스 간의 연합체였다. 따라서 각각 폴리스 간 해양 교역이 강제되었고, 이러한 지리적 배경에 의해 민주주의가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민운동 또한 그렇다. 르네 상시 시기, 신항로 계척으로 인해 교역이 활발해졌다. 활발해진 교역은 막대한 부를 끌어들였고, 평민 상인 부유층이란 새로운 계층을 만들어네었다. 이들을 일컬어 부르주아라고 불렀다. 부르주아지들과 기존 귀족들 간의 실질적 차이가 줄어들면서 부르주아들은 이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났다. 취약했던 사유제산을 보호받길 원했고, 마음껏 경제활동을 할 권리, 국정에 참여할 권리를 원했다. 이러한 욕구는 자유주의와 시민 정치 참여를 이끌어넸으며 때마침 부흥한 사상의 조류와 함께 시민운동을 이루어넸다. 그 이후 더 많은 시민운동과 근대적 국가의 설림, 사회주의의 태동 등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치며 민주주의가 제대로 들어서게 되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하여 건 간 유럽에서 민주주의가 생겨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민주주의를 충족시킬 요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민주주의가 원하는 사회적 요건은 유기적 자본주의와 발전된 시민의식이다. 자본이 촘촘하게 배열될수록, 시민 의식이 더 고취될수록 민주주의는 더 평등하고 자유로워졌다. 반대로 말해 만약 두 요소 중 어느 하나가 모자란다면 아무리 외부 압력이 들어와도 그곳에선 민주주의가 자라나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그랬다. 사사오입 사건이나 정치깡패의 존재 등 초기 대한민국 정치 상황을 보면 독제 정권의 대립은 가히 필연적인 수준이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두 번에 걸친 쿠데타와 수많은 데모와 시위, 기적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고 나서야 어엿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빨리 민주주의 사회에 돌입했으나 그 조차도 민주주의를 시도하고 난 후부터 5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회가 사상을 따라가지 않고 사상이 사회를 이끌고 갈 때 필연적으로 투쟁을 부르며 누구 하나는 피를 흘린다.

굳이 민주주의가 아니더라도 여타 사상들 또한 같다. 사회주의는 특히 민주주의보다 더 높은 수준의 유물론적 발전을 선제했다  높은 생산력과 잘 짜인 사회망, 또 인민들의 제도적 이해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 추종자들은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고, 그들은 혁명을 통해 사회를 이끌기 시작했다. 하나 사회주의를 위한 현실적 허들은 너무 높았으며, 살짝만 삐끗하면 독제체제로 바뀌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사회주의를 혁명으로서 이루겠다는 시도는 실패했다. 소련은 무너졌고 러시아는 실질적 일인 독제체제로 바뀌었다. 수많은 공산국가들은 소련과 비슷한 전철을 밟거나 자본주의를 일부 도입하는 등 노선을 바꿔야 했다. 사상을 주도한 것은 소수의 정치 지도자들이었으나 사상의 실패는 모두의 몪으로 돌아갔다. 이만큼 어떠한 사상의 실패는 뼈아프다.

자 다시 페미니즘으로 돌아와 보자. 페미니즘만큼 현대적인 사상이 또 없다. 탈 현대적이라고 할까. 포스트모더니즘 철학과 젠더와 권력의 심리학, 불평등과 정의의 사회학이 모두 녹아든 가장 최근의 인문사회적 현상이다. 그러면서도 가장 활발하고 많은 이슈를 만들어네고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과연 후대에 기록이 될지, 기록이 되더라도 현대사상의 실패로 기록될지, '이론을 좋았으나 그저 그랬던' 평가를 받을지, 아니면 성공한 운동으로 기록될지는 현 페미니즘 운동가들의 행동 여하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군주정을 탈피해 새로운 대안을 보여주던 두 사상,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실패했을 때 그 대가는 새로운 형태의 군주 독재였다. 가치가 전도되어야 하는데 반전으로 그쳤던 것이다. 결국 순서의 문제이다. 페미니즘 역시 기존 성별 구도를 전도시키기 위함인데, 이에는 먼저 이뤄져야 할 유물론적 조건이 필요하다.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다면 페미니즘이 승리하더라도 불평등한 양성 간 권력의 반전 그 이상 그 이하도 못 될 것이다.(만약 이러한 역차별이 페미니즘의 목적이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것을 새로운 파시즘이라 부르겠다.) 만약 페미니즘이 성공한 실패를 하게 된다면 그 책임과 대가는 모든 민중에게로 돌아갈 테고, 깊은 자상을 입은 민중은 페미니즘을 다시는 거들떠도 보지 않으리라. 사회주의와 싸워 이기느라 정작 필요한 수준의 사회 제도까지도 거절하는 극단 자유주의자들과 같이 말이다. 이렇게 되어선 안된다.

마시멜로를 목전에 둔 어린아이처럼 페미니즘의 실현은 목마르지만, 급해서는 될 것도 되지 않는다. 기본 인권과 복지가 충족되지 않았는데 페미니즘을 기대하는 것은 북한이 갑자기 민주주의 사회로 바뀌는 걸 기대하는 건 만큼이나마 비현실적인 말이다.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유익할지 모르나 때에 따라 그것을 직접 하는 것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 페미니즘 이론이 사회에 접목되면서 나는 잡음에 대해 그저 반대자들의 불평불만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페미니즘을 전진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이러한 잡음을 반전의 전조로 여기고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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