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대륙 한정판
우리는 기원전 700년부터 500년까지 근 200년간을 축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 시대에 인류사의 축이 될 만한 정신적 유산들이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축의 시대에 두각을 보인 인물들만 하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대충 읊어봐도 일단은 싯다르타, 공자, 소크라테스가 이때의 인물들이었다. 이 것만 봐도 이때가 인류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시대였는지 감이 잡힌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우선 중국은 이때 춘추전국시대였다. 제자백가라 하여 수많은 사상가들이 활동하였었다. 그중 공자를 필두로 그의 위대한 경쟁자들, 노자, 묵자, 고자, 좀 후로는 맹자와 장자 순자 한비자가 있으며 이들은 각각 유가 묵가 도가 등등의 사상을 만들어 지난 수 백 수 천년 간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통치 이념으로서 사용되었다. 그리고 지중해 연안 삼삼ㅁ오오 모여 살던 폴리스들이 온갖 기기묘묘한 철학 자을 배출 했다. 우선 소크라테스의 지지자 플라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고 피타고라스, 제논, 파니 메데스, 디오게네스, 헤라 클레 토이스, 파니 메데스 등등등... 수많은 학자들이 각각 개성 있으면서도 논리 정연한 주장을 내세웠으며 이들 몇몇 이들의 주장은 그것이 완전히 해석되기까지 수 세기가 걸리기도 했다.
또한 인도에선 이때엔 브라만교가 퍼져 있었다. 권력을 가진 종교가 다 그렇듯 브라만교는 제식에 집중하느라 계급에 따른 차별이 심화되고 사제들의 독선과 부정부패가 나날이 심해져 갔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종교개혁을 주장하며 들고일어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주장을 나누어 세어 보면 거진 62가지 학파로 나눌 수 있었다. 이렇게 종교적으로 들고일어난 사람들을 일컬어 사문이라고 불렀는데, 이 사문들 중 하나가 바로 왕자 출신인 싯다르타였다. 아시다시피 이 싯다르타란 사문은 불교를 제창하며 서방과 동방에 이루 말할 대 없는 영향을 끼쳤다. 기록은 좀 모자라지만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자라투스트라 역시 이 시대에 태어났다. 자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겐 니체의 작품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이어지는 사건으로 유대인들의 바빌론의 유수가 있다. 이때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과 악마의 계념이 유대교와 융합하여 우리가 아는 유일신앙 유대교로 제 정립되며, 랍비 에스라를 주축으로 유대교를 개혁해 안식일 등 유대교의 지식을 담은 경전인 토라와 탈무드를 완성시켰다.
그렇다면 이 축의 시대는 순전히 우연일까? 어떤 면은 우연이지만, 하지만 어떤 면은 그저 우연이라 볼 수만은 없다. 이 축의 시대를 어느 정도 설명해 주는 가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피터 터 친의 유목민 가설이다. 이 시대에 부흥하던 유목민들은 제 빠른 기마대들을 이끌고 이 나라 저 나라 들쑤시고 다녔었다. 이 기마 부대는 소위 ‘문명’ 사회를 뒤흔든 큰 충격이었다. 난세에 영웅이 등장한다고, 국민과 지도자를 하나로 묶는 보편 윤리가 필요해졌다. 그리하여 당시 지식인들은 혼돈을 해독할 보편윤리 자체를 내세우면서, 혹은 보편윤리를 무기 삼아 휘두르던 전제적인 지도자의 힘에 반항하면서 새로운 종교와 사상을 봇물 터트리듯 쏫나넨 것이다. 이때 등장한 사상들은 공통적으로 도덕성, 자기 수양, 금욕을 강조하였다. 아직도 인류의 사상과 철학의 중심축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누군가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축의 시대 이후 인류 정신사는 축의 시대에 나타난 사상들의 각주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렇다면 이 축의 시대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일명 고대 철학은 어떤 것 이었을까. 물론 철학 이전엔 문명이 있었다. 축의 시대의 발판이 되어 준 고대 문명들을 살펴보자. 고대 문명들은 철학적 문제에 대한 각각의 태도를 유지했다. 일명 ‘서방’ 지역 지성의 뿌리는 중근동 희랍 지역으로 향한다. 희랍에서 생겨난 고대 문명은 큰 줄기로 잡아 보면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꼽을 수 있다. 이집트인들은 알다시피 죽음의 문제에 집중했다. 그래서 현세에 관련된 철학적 진보는 그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반면 바빌로니아의 발전은 호전적이었다. 바빌로니아 인들은 잦은 전쟁과 점령 속에서 현새의 번영과 발전을 바랐다. 그리하여 대홍수와 낙원 설화 등의 물질적 신화와 마술, 점술, 점성술이 발전했다. 바빌로니아 문명의 종교는 메소포타미아와 수메르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우리에겐 길가메시 서사로 더 유명하다. 이들의 신화적 부분 중 대홍수 설화와 신들의 낙원 등을 유대교에게로 이어 지진다. 또한 점성술과 마술 천체 지식들은 향후 탈래스를 비롯한 그리스 학자들에게로 이어진다. 이 이후에 일명 호메로스 시대가 오는데, 어째서 호메로스 시대나 하면, 이 시기를 알 수 있는 저서가 호메로스의 두 사가 오디세이아와 일리야스뿐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때 모든 문명들의 지식인들이 갑자기 저술 활동에 흥미를 잃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당시 활동했던 바다 민족들의 광범위한 약탈 파괴 행위로 인해 역사적 기록물이 전부 유실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암흑시대의 시대상에 대해선 호메로스의 두 작품에 의해 살짝살짝 엿볼 수 있을 뿐이다.
호메로스 신화는 향후 그리스 신화로 이어지는데, 그 안에는 주목할 만한 작품적 특징이 있다. 첫째론 사가에 등장하는 신과 영웅 모두 그리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당장에 주인공 오이디푸스도 부친을 살해하고 근친을 한다. 신들 역시 질투를 하고 영웅을 시험에 들게 하는 등 거친 모습을 보인다. 절대적인 힘을 지녔고, 성질도 더러운 신과 영웅을 휩쓰는 건 바로 운명이다. 이 운명이 호메로스 사가의 두 번째 특징이다. 신 조차 이기지 못하는 숙명, 필연이 있다. 신이나 절대자, 초월자라도 그 삶에 서린 어떠한 법칙, 운명 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는 그저 등장인물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시적 장치일 뿐이 아니다. 소위 ‘신조차 모독하는’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 시기, 그 당시 세계엔 어떤 절대자도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이 있다는 보편적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한 세계를 구성하는 법칙에 관한 사고방식은 그대로 그리스 철학으로 그 두각을 나타나게 된다.
러셀은 서양철학사에서 그리스 철학의 탄생을 지정학적으로 고찰하기도 했다. 산골짜기 간 계곡 계곡에서 자라난 도시들은 점점 인구가 많아졌다. 제한된 자원 속에서 도시는 포화될 운명이었으며 따라서 사람들은 산으로 막힌 육료 대신 광활이 뻣은 해로를 통해 식민지를 찾아 뻣어나갔다. 해로를 이용한 활동은 멀리 떨어진 지역 간 교류를 촉진시켰다. 서로 다른 언어와 언어 속 계념적 사유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배경 요소를 통해 절학의 폭발적인 발전이 시작된다.
인도로 넘어가 보자. 기원전 약 1000년 전 고대 인도에 어느 날 아리아인들이 찾아온다. 이들은 이 지역 토속 민족들을 점령하고 노예로 삼는다. 아리아인들은 효과적인 노예제도를 위해 바루나라는 신분차별제도를 만들었다. 바루나는 샨스 크리 트어로 색이라는 뜻이며 즉 피부색으로 계급을 나눈 것이다. 피부가 하얀 자신들은 상위 계급에, 피부가 검은 원주민들은 하위 계급에 놓고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하리잔 순서대로 고결함, 청결함을 나누었고 이는 즉 우리가 아는 카스트가 된다. 아리아인들이 남긴 경전은 크게 둘이 있는데 하나는 아베스타라는 경전이고 또 하나는 리그베다이다. 아베스타는 조로아 스타의 경전을 모아 만든 것이고 리그베다는 브라만교의 경전을 모아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역으로 아베스타는 조로아스터교에 영향을 주었고, 리그베다는 브라만교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지금은 우선 인도 지역 쪽에 집중해보자. 인도 지역 토속 설화는 크게 둘이 있다. 푸르 샤 창조설화와 브라만 창조설화이다. 두 설화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절대자가 자기 자신을 복제함으로써 이 세계를 창조해넸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도 토속 세계관에서 세계의 물질은 신의 일부분이며 신은 곳 이 세계를 상징한다. 인간 역시 신의 일부분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절대자와 피조물 간의 차이와 관계를 중요시하는 유대-기독교 계통과 인도 지역 종교의 차이를 만든다. 인도를 기준으로 서쪽에선 세계를 절대자의 창조물로 보는 시각이 주를 이뤘고 동쪽에선 세계를 절대자의 부분으로 여기는 시각이 주를 이뤘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기독교적 영지주의 같은 일부 예외적 시도를 제외하면 이런 기조는 바뀌지 않는다.
영지주의를 뭉뚱그려 설명하자면 인간 지성의 수양을 통해 범세계적 초월성을 얻는 모든 사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자 대부분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 작은 범위의 영지주의는 물질을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지성을 통해 신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주장들을 의미한다. 카발라 등을 사용하는 기독교 계열 밀교가 이 범주에 들어간다. 하나 큰 범위의 영지주의던 작은 범위의 영지주의든 중세에 들어서면서 이단으로 여겨졌고 그 맹백이 끊긴다. 훗날 스피노자 같은 르네상스 철학자들이 이들과 유사한 사상을 주창하면서 살짝씩 제 조명을 받는 정도에 국한된다. 다시 고대 인도로 돌아와서, 고대 인도의 이러한 토속적 세계관을 정립한 것이 바로 베다는 경전들이다. 이는 베다는 산스크리트어로 알다 혹은 경전이란 뜻이며, 리그베다, 야주르베다,·사마베다, 아타르 바베다 이 네 베다가 브라만교의 주요 4 경전이 된다. 이 경전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기원전 1500년부터 500년 까지를 베다의 시대라고 부른다. 고대 브라만교는 바람, 태양, 물, 땅 등 자연 요소를 신격화하여 각각 그에 맞는 제사와 제식을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각각 3000개가 넘는 다신들이 만들어졌다. 이는 즉 더 많은 제사장과 사제, 더 많은 제례와 의식을 의미했다. 때 마침 찾아온 인도의 태평성대는 이를 더 심화시켰다. 이는 계급 간 차이를 더 심화시켰고 사제 계급의 뷔페와 물질 집착으로 인한 폐단이 이뤄진다. 따라서 이러한 브라만교의 폐단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들을 일컬어 사문들이라 불렀다.
유명한 브라만 경전인 우파니샤드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생겨났다. 이때가 기원전 500 년 무렵이다. 여타 베다와 같이 우파니샤드 역시 여러 경전의 집합이다. 우파니샤드는 공통적으로 물질을 버릴 것, 고행과 수양을 할 것, 자신의 아트만(참나)을 볼 것을 강조한다. 사문들 역시 이에 따라 수양을 위해 도시를 떠나 숲으로 들어갔다. 사문들 스스로 일컬어 이때를 숲의 시대라 불렀다. 3000여 가지의 신이 있는 만큼 수행자들의 수행법 역시 다양했다. 이 수행법들을 크게 둘로 나누면 정신을 이용한 수행법과 육체를 이용한 수행법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둘은 각각 명상과 요가로 나타나는데 그 목표는 동일하다. 정신, 육체 어느 쪽을 먼저 하던지 간에 이 들이 세계와 합일해 있다는 것을 알고, 아트만(참나)을 알 라차리는 것이다. 하지만 숲의 시대를 통해서도 현실의 개혁은 녹록지 않았던 모양이다. 카스트 제도는 여전했고 사람들은 고통받았다. 그러던 중 싯다르타란 왕자 출신의 수행자가 나타났고, 그렇게 불교가 탄생하게 된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특히 유가 쪽 저서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요순으로 대표되는 옛 성군들 대한 신화적 그리움이다. 제자백가의 사상에선 절대자에 대한 숭배나 합일을 찾아보기 힘들다. 바빌로니아-그리스가 세계의 탐구로 이익을 얻어보고자 했으며, 인도에선 개인의 수양으로 해탈을 얻고자 했다면 중국에선 국가적 정치 이념에 집중했다. 제자백가가 숭배했던 것 들은 그나마 요순으로 통하는 옛 선왕들과 도교의 도 가 있겠지만 옛 선왕들은 비록 지금은 허구 인물이라고 여기더라도 그때만 해도 역사적 사실로서 아담과 하와라던가 신과 천사 같은 신적 존제, 신화적 존재라기보다는 다윗과 솔로몬 정도의 ‘좋은 예시’에 불과했다. 도교의 도는 브라만교의 브라만, 아트만과 비슷하다. 도는 도가 아니다.(도가도 비상도)는 말과 브라만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네티 네티)는 등 많은 요소가 흡사하여 브라만교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란 합리적 의심을 해 볼 만 하지만, 브라만이 인도에선 수양의 목표, 혹은 숭배의 대상이라면 도가에서 도는 개인의 수양을 통해 올바른 정치를 하게 만드는, 하나의 정치 이념으로 쓰였다. 중국의 토속적인 문화가 브라만을 정치 이념으로 소화시킨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공자의 일생을 정리해보자. 공자는 노나라 군신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궂은일을 하고 자라다가 서른 즈음에 학원을 열어 사람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공자는 그 당시 잦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사회를 바로 새우기 위한 방법으로 인과 예를 주장했다. 즉 아주 없었던 말을 만들었던 게 아니고 뭔가 크게 계성 있는 주장을 한 것도 아니다. 이는 공자가 자신의 사상을 종교 이념이 아닌 정치사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사상이라 치면 다소 이상적인 주장이었기 때문에 개개인의 칭송을 받을지언정 나라 정치적 단위로는 환영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이념을 받아 줄 나라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자는 그가 죽기 전까지 정치인의 자리에 앉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각 국가로 퍼져 군주를 조언했고 그리하여 유가의 영향력은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노자, 장자 같은 반권력적인 인물을 제외하면 묵자나 맹자, 순자, 한비자 같은 인물들도 공자와 같은 전철을 밟았다. 학교를 세우고 자신을 받아주는 나라를 찾아가거나, 혹은 왕이 직접 찾아와 지혜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