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다.
나는 인간을 발골하여 고깃덩이로 만들었다. 인육 한 무더기를 바깨스에 담고 집에 오는데, 암만 생각해 봐도 인육을 둘 자리가 없었다. 어디에 숨겨놔야 하는데 그늘 진 곳에 뒀다간 고기가 썩어 들킬 것이고 양지 마른 곳에 뒀다간 금방 눈에 띄어 들킬 수밖에 없다. 결국 난 그 인육 한 무더기를 창문 밖으로 던지고 말았다.
인간이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이 있는 자유로운 존재냐, 아니면 갈대가 흔들리듯 환경에 휩쓸리는 존재냐에 대한 화두는 역사와 함께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 싸움을 잠자코 보고 있던 과학은 마침내 다가와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사람은 신성한 영을 받은 존재이거나 무궁한 백지장을 가진 존재도 아닌, 사회와 환경, dna의 총합이었던 것이다.
화두가 끝나고 인간을 차연하게 바라보는 사상, 즉 포스트모더니즘이 떠올랐다. 이제 우리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영혼은 이제 언어 속에만 존제하게 되었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인간 해체에 관하여 아즈텍의 인간 제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이 사회가 구조에 갇혀 얼어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해체를 감행한다. 그것은 태양을 띄우기 위해 인간을 바치는 제사장들과 같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제물,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해체, 그들은 구조를 위해 구조를 해체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이 허상이며 모순되며 순환한다는 것을 안다. 인간이 해체되면 남은 고기는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남은 껍데기를 가지고 논다. 인간이 해체되면 그곳엔 차가운 언어만이 남는다. 언어를 가지고 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뒷발 치엔 희미한 인상만이 거기에 있다.
사회 속의 인간, 가정 속의 인간, 의식으로서의 인간, 무의식으로서의 인간, 타자로서 인간, 자아로서의 인간... 그들이 말하듯 우리는 얼어붙지 않기 위해 멀리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수많은 인간을 해체하고 남은 건 핏물이 흐르는 고깃덩이뿐이다. 이 고깃덩이를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는 일각의 각성을 요구받고 있다. 성년의 초기에 다가온 실존적 위기가 꿈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