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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석 Feb 26. 2020

식사의 의미

매개체로서의 밥

보노보는 무리를 유지하기 위해 섹스를 이용한다. 만나면 섹스하고 화해하면 섹스하고 친하면 섹스하고 다 같이 친하면 다 같이 섹스한다. 보노보에겐 섹스가 그저 성욕의 해소가 아닌 서로를 잊기 위한 매개체인 것이다.
보노보가 섹스를 한다면, 우리는 식사를 한다.  우리에겐 식사 역시 그저 식욕의 해소가 아닌 서로 이어지기 위한 매개체로도 사용된다. 사람과 처음 만나면 서로 알기 위해 밥을 대접하고, 떠날 땐 잘 보네 주기 위해 밥을 대접한다. 기쁜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하기 위해 밥을 준비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같이 슬퍼하기 위해 밥을 준비한다. 결혼식을 하면 하객들을 위해 뷔페를 꾸리며, 장례 시 문상객들을 위해 육개장을 준비한다.


밥, 식사는 대상과의 매개하는 또 하나의 대화법이다. 고로 밥을 대접해 준다는 것은 그대와 이어지고 싶다, 호감을 가진다, 환영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에겐 밥을 대접하고 받는 것은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큼 중요하다. 심지어 한국에선 고사와 제사를 통해 귀신과도 식사를 대접하면서 매개할 수 있다. 고사는  귀신에게 예식 절차를 통해 복을 부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귀신과 매개하는 요소중 식단과 상차림은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귀신마다 식성이 따로 있고 접시를 놓는 위치도 달라진다. 매개의 대상이 구채적인 제사의 경우 밥, 식사 자체가 의례의 중심이 된다. 심지어 으래 알려진 제사의 예식이 있더라도 생전 고인의 식성과 부탁 따라 제사상의 내용물이 바뀌기도 한다. 식사가 의례에 앞서는 것이다. 그만큼 식사가 가진 상징성은 강력하다.


하지만 사회의 분리를 바라는 사람들은 식사의 매개적 요소를 역이용했다. 특히 옛날 계급사회에선 매개의 교류가 아닌 매개의 단절을 통해, 또 그 분리를 이용해 권위를 표현했다. 옛 식사 예절에선 같은 집안에서도 남자와 여자끼리, 또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끼리 상을 나눴다. 또한 계급에 따라서도 함부로 겸상하지 않았고, 예에 맞는 식사가 아니면 거부되기도 했다. 식사의 반찬 수는 높은 지위를 상징했다. 각 계급별로 왕은 12첩, 공경대부는 9첩, 양반은 7첩 그 이하는 5첩이나 3첩 등으로 식단 별로 계급을 구분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구분이 엄격히 지켜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첩 수가 마치 현대의 자동차나 명품 시계 같은 ‘힘’의 상징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러한 문화는 완전히 거꾸로 바뀌었다. 계급과 가부장제는 없어지거나 희석되었고,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며 평등의 원칙이 사회 저변에 퍼졌다. 자연스럽게 바뀌기도 하고 강제로 주입되기도 하며 문화의 양상이 달라졌다. 실제 계층 간 구분은 사라지지 않았을 지라도 각상을 통한 권위의 표출은 악덕으로 치부되며, 사회 고위층들은 서민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대중적인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치인들이 선거철 '서민음식'을 먹는 것 떠올려보자.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것을 아주 잘해 아직까지도 화자 되며,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것을 잘 못해 도리어 놀림을 받았었다.


식사의 구분이 엄격하던 문화에서 겸상이 예의가 되고, 각상은 '혼밥'이라 불리며 꺼리는 문화로 바뀐 이유가 뭘까? 한국의 전근대는 격동의 시대였기 때문에 그 이유를 콕 집어 무어라 말하기는 어렵다.

 조심스럽게 가설을 하나 세워보겠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분단, 잦은 국가적 혼란을 겪으며 사회는 파편화되으며 사회 구성원 간 괴리감과 이로 인한 갈등은 심해져갔다. 그러나 밥에 관해서 까지 바뀌지 않았다. 박사모 이 씨와 열혈 운동권 조 씨, 판소리를 좋아하는 81세 강 씨와 하드베이스 마니아 17세 차 씨 모두 한 식탁 아래서 같은 밥을 먹으면 식사의 마력에 의해 그때만큼은 하나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식사는 파편화된 사회를 동질감과 공감으로 이어주는 도구로서 쓰이게  것이다.




식사는 상징의 모음이다.

 한국인에게 식사는 참으로 상징적이다. 이러한 경향성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는 듯하다. 김치는 이제 한국인들을 표현하는 기호가 되었다. 특정 식사는 지역, 세대, 가난함, 부유함, 그리고 전쟁과 평화까지도 구분하는 기호로 정착되었다. 김치는 한국의 기호, 짜장면은 대중성의 기호이다. 국밥은 서민의 기호이고, 치킨은 소소한 행복의 기호이다. 고깃국은 옛 부를 향한 욕구의 심벌이며, 한우는 부유의 상징이다. 떡볶이는 젊은 층의 기호, 홍어는 전라도의 기호, 감자는 강원도의 기호, 과메기는 경상도의 기호, 돼지국밥은 부산의 기호, 귤은 제주의 기호, 등등등...


고전적인 가치를 가진 김치, 소주, 짜장면, 라면, 짜장면 같은 음식들의 상징성은 이제 표리 부동하다. 그런 한편 신세대들의 새로운 감각 속에서 국밥, 치킨, 아메리카노, 마카롱, 삼각김밥, 민트 초코 등등 음식 이상의 가치를 지닌 음식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우리는 밥이 아닌 가치를 먹는다. 우리는 하루에 3번씩이나 가치를 먹는다. 한정식은 우리에게 박물관이며, 신세대의 분식은 마치 현대를 그려넨 한 편의 사설 논평과도 같다. 고정된 가치는 사라지고 인간 홀로 남겨진 현대의 각박한 삶 속에서, 이러한 가치를 마주하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가치 속에서 기쁨을 느낀다. 하루 3번 있는 기쁨의 기회를 마음껏 누려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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