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무요원 수필 (3)
첫 번째 민원인이 준 교훈
복지관엔 민원인들이 자주 온다. 하나 신기한 것이, 민원인들은 전부 다 다른 사람이지만 어째선가 전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살짝 긴장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용기를 머금은 표정. 사실 그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그대들의 분노와 불만을 억누르고 대화와 행정 처리를 위해 찾아온 이들이다. 그 나름대로 ‘극기복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민원을 받는 입장에서 그들의 극기를 이해하고 최대한 예를 갖춰서 대할 필요가 있다. 내가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처음 만난 민원인 때문이다.
내가 복지관에 온 지 얼마 안 됐었을 때 일이다. 그때는 가을이었지만 아직 낙엽이 지지 안았었다. 하지만 여름 티를 전부 벗어던진 날씨는 시원한 바람을 쏘고 있었다. 왜냐면 그때가 추석 지나고 얼마 안 되서였으니 절대 가을이 아닐 수는 없었으니까. 아니 솔직하게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랬던 것 같다.
몽골 부족의 전통 중엔 연장자를 문이 보이는 안쪽 벽에 앉히는 예절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습격자가 들어와도 중요한 연장자는 안전하고,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신참들이 몸으로 막을 수 있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이 앉은 위치와 장소에 따라 그 권력의 구도를 볼 수 있다. 사실 우리네 사무실도 마찬가지다. 관장님은 가장 안 쪽에 각 방을 쓰시고 사무실 가장 구석엔 부장님이 파티션 속에 숨이 있다. 그 양옆으론 팀장님이 있고, 그다음엔 직원들, 그리고 마지막엔 우리 사회복무요원들이 앉아 있다. 사실 이 걸 굳이 상의를 하면서 까지 정한 건 아닌데, 어쩨선가 우리 모두 이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의 눈치와 분위기란 정말 무서운 녀석이다. 아무튼, 나는 거기서 이제 온 지 얼마 안 된 사회복무요원이었고, 따라서 사무실에서 가장 문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게 되었다. 자리의 책상은 살짝 낮았으며 유리가 반만 덮여 있어서 책을 놓고 보면 책 등쌀이 유리 모서리에 긁혔다. 바로 뒤가 문이라 오고 갈 때마다 내가 뭘 하는지 훤히 보였다. 안 그래도 붙임성이 없는 사람인데 오픈된 자리에 앉으니 어색하기 이를 대 없었다.
사무실에 온 지 일주일은 됐을까, 아직 어색한 사무실 공기를 맞보고 있는데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한 할아버지가 사무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팡이를 집었는데 그 지팡이가 파들파들 떨릴 정도로 지팡이에 몸무게를 실어 걷고 있었다. 그 속도가 너무 느려서 걷는다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몸이 얼마나 말랐는지 주름져 축 늘어진 목 거죽에 멍물만 툭 튀어나와 있었고, 허리는 살짝 굽어 있었다. 뭔가 웅얼웅얼 말을 씹고 있었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듣는 것도 잘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입이 움찔움찔할 때마다 침이 흘렀는데, 이가 빠져 있음에도 틀니를 하지 않아서 그랬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 초면은 아니었다. 어제인가 엊그제인가 그때도 비슷한 모습으로 복지관에 찾아와 뭔가 민원을 놓고 가셨었다. 그때는 다른 복지사분이 나보다 먼저 나와 받았기 때문에 자세한 전말을 잘 모르지만, 그 할아버지는 명백히 나를 향해 오고 계셨다. 나는 살짝 귀찮았지만 선심을 쓰며 말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못 알아들을 말로 웅얼거리만 하셨다. 나는 뭐 이런 노인이 다 있어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 할아버지가 쓰고 있었던 모자를 보자, 적확히는 모자 한 편에 박음질돼 있던 글귀를 보자 그 마음이 싹 가셨다.
그 모자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국가유공자’
국가유공자라, 나는 순간 그 할아버지가 늙은이에서 어르신으로 둔갑하는 경험을 했다. 두 번 보아서야 알아차린 그 사실은 나에게 꽤나 큰 충격이었다. 국가유공자는 국가가 공인한 선인일 텐데 어찌 그런 몰골을 하시나이까. 내 안에 자로가 들썩였다. 그때 폭풍이 두 번 치듯 사고의 전환 또한 두 번 일어났다.
만약 그 할아버지가 국가유공자가 아니라면 나는 계속 같은 마음가짐을 하고, 그 할아버지는 끝까지 늙은이였을 것이다. 나는 국가유공자에게 복지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도움받아야 할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인데 뭐가 있다고 마음 가짐을 바꿔 먹었는다? 지금 와서 뭣 하나 상관없을 박음 된 그 몇 자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고 선악을 바꾸고 짜증을 거두는 나는 그야말로 위선자였다. 나는 그 자수는커녕 어디 하나 푹 패인 자국만 있는 노인들을 얼마나 못 되게 보고 있었던 것인가.
내가 올바르게 대접받디 위해선 남을 올바르게 대접해야 할까? 또 남도 내게 올바르게 대접받기 위해선 남도 올바르게 대접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째서 대자대비한 부처가 숭상받고, 자비와 사랑을 가르치고 떠난 예수에게 기도를 하는가. 사람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원하면서 조건적인 사랑에 속아 진정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고 있다. 감정을 사고팔 수 없는 물건이다. 물건이 지나간 감정은 그렇게 바뀌고, 흔들린다. 마치 내가 글자 몇에 마음이 움직인 것처럼 말이다. 사람을 볼 때 어떤 허물도 없이 바라보아야 한다. 사람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이 대명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공작새의 몸통은 없이 깃털만을 보고 공작새라 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생선 비늘을 벗기고 생선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몸통은 아름답지 않지만 깃털은 몸통에 붙어 있어야만 아름답고 생선 고기 역시 반짝이지 않으나 비늘이 몸통을 벗어나면 그 빛을 잃는다. 사람 또한 그렇다. 아무리 아름다운 수식어라도, 그 안에 사람이 없으면 아름다울 수 없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이런 얼핏 거창한 말은 정말 하찮게도, 걷기 힘들어하는 할아버지를 잠시 내 자리에 앉히는 것으로 사람의 소중함을 지킬 수 있고 또 실천할 수 있다. 어떠한 지름길도 요행도 이런 가치를 내주지 못했었다. 결국, 바른 길이 가장 빠른 길인 것이다. 사회복무요원 생활 중 내게 온 첫 번째 민원인은 지울 수 없는 가르침을 내게 주었다. 그래서 나는 민원인을 미워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