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석 Mar 25. 2020

요주의 인물 플라톤

역사를 보는 자세

플라톤은 언제나 철학계 요주의 인물이다. 서양 철학계에서 플라톤이 끼지 않는 곳이 없다. 철학사 양서를 가져다 놓고 눈 감은 다음 아무 곳이나 펼쳐서 찍으면, 열에 여덟은 플라톤이 직접 영향을 주었고 나머지 둘은 간접적으로라도 영향을 받아 있다. 사실상 플라톤 이후 서양 철학사는 그 절반은 플라톤을 옹호하면서 쓰였고 나머지 절반은 플라톤을 부정하며 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서양 철학의 토속적 원형이며, 그는 서양 철학이 발전하며 범해온 수많은 정답과 오답의 근본적인 책임자이다. 그는 이데아를 만들었고, 이데아는 기독교의 부분이 되었다. 기독교에 반발한 철학자들은 회의주의를 만들었고 회의주의는 관념론이 된다. 관념론은 또다시 수 십 가지 사상으로 쪼게 져서 근대 유럽은 만든다. 어찌 보면 식민지 주의자들의 뻔뻔스러운 미덕도, 파시스트들의 공격적인 침략 사상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다 보면 최종적인 특이점에 플라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플라톤에 책임을 묻거나 플라톤 철학을 완전한 오류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견, 노인의 발언이 틀렸더라도 그 말엔 지식이 덕지덕지 붙어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만약에, 정말 만약에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주창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원자론자들이 살아남았고, 좀 더 현실에 집중하는 철학이 발달했다면 어땟을까. 실재론과 유명론이라는 비생산적인 논쟁 없이 인류 전채를 위한 더 생산적인 발전이 이루어졌었을 수도 있었을 터이다. 고로 플라톤은 유죄에 처해진다. 죄몪은 인류의 지성을 낭비시킨 죄. 그러나 판사들은 철학자 플라톤의 강렬한 캐릭터 리티에 속아 인간 플라톤은 잊어버린 것이다. 플라톤 철학의 잘못이라면 그저 많이 불리고 다닌 것뿐이며, 그 당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 밖에 없다.


어떠한 사상에 허물이 있다고 파괴와 외면으로 대응하는 행위는 부조리하며 위험하다. 실제로 플라톤 말고도 더 노골적으로 이런 취급을 받는 사람이 몇몇 있다. 우선 하이데거, 그는 나치 부역자로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낫이 부끄러워져야만 한다. 또한 종교인에겐 니체가 있고, 또 제2 세계, 제3 세계 지식인들에게 있어 헤겔 또한 악의적인 식민지주의 옹호자로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또 무엇이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선 마르크스가 있겠고, 창조론자들에겐 다윈이 이와 같겠다.


그러나 어떤 지식이든 지식이다. 우리 인류는 이미 교훈을 얻을 몇 번의 일이 있었다. 한 가지 강렬한 예시가 있다. 바로 중국의 문화 대혁명 시기이다. 홍위병들은 대 중화를 근대의 물살에 망가트려 버린 책임자를 구 체제로 삼았고, 그들은 공자의 사당과 묘를 불사르고 또 자신에게 비참한 현재를 안겨줬다는 죄몪으로 파괴해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옛 예들 대다수를 잃어버려 무엇이 사라졌는지 조차 가능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부조리를 발견했을 때, 그 부조리를 너머 섬이 포옹을 통한 너머 섬이 아니라 파괴로 인한 너머 섬이라면 결국 자기가 부순 조각을 다시 이어 붙이는 추례한 몰골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소속되지 않으려는 세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