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그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를 알 수 있을까? 그는 못생겼었다. 외모가 곳 능력이었던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그는 아주 특이한 별종이었으리라. 그는 참전용사였다. 한겨울에 샌들에 옷가지 하나만 걸치고도 의연하였다고 한다. 이 의연함은 기록 곳곳에서 보인다. 어디든 멀뚱히 서서 몽상에 잠겼다고 하는데, 이런 행동을 일종의 정신적 증상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그는 아고라의 질문쟁이였다. 꽤나 한 똑똑했는지 금방 사람을 끌어모았다. 딱히 저작을 남기지 않았지만 지지자로든 정적으로든 그를 노려보는 사람은 많았고,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는 데 성공했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이 체 끝나지도 않은 시절, 뒤숭숭했던 사회 분위기 속에 그는 금방 유명인이 되었을 것이다. 덕분에 자기를 모티브로 한 연극 캐릭터도 만들어졌고, 플라톤 같은 운동선수 출신에 몸 좋고 얼굴 반반한 추종자도 얻게 된다. 하지만 그는 절대 주류는 아니었다.
소크라테스가 마음에 안 들었던 밀레토스와 같은 이들은 그를 ‘신을 모독하고 젊은이들을 현속시켰다.’는 다분히 정치적 목적이 뻔히 드러나 보이는 허술한 죄목으로 소크라테스를 고발한다. 여기서 잠깐 시대적 상황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활동한 때는 펠레폰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펠레폰 전쟁은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 벌어진 전쟁이었고 소크라테스 역시 참전했었다. 펠레폰 전쟁은 스파르타의 판정승으로 끝났고, 승자인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20인 과두정을 새웠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 익숙했던 아테네 시민들의 반발은 거샜다. 20인 과두정은 1년도 체 가지 못하였으며 아테네는 민주주의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민주주의도 증오로 얼룩진 빗바렌 민주주의였다. 과두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정치범 특별사면과 정적들을 향한 특별 기소가 오고 가며 더러운 정치싸움이 벌어졌으며 말도 안 되는 구실로 제판이 이루어졌다. 많은 이들이 추방당하거나 사형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엉뚱한 죄몪으로 사형을 내미는 것이 딱히 소크라테스만 엉뚱한 것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정치적 정적을 없애는 방법이 그랬다. 그렇게 추방당한 이들은 다른 지역에 망명을 갔는데, 계중엔 적국인 페르시아로 가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국 상황 속에서 소크라테스 역시 사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때 소크라테스는 70줄에 다 달한 노인이었으니 굳이 도망가거나 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대신 그는 끽해야 몇 년 도망자로서의 인생보다 인류사에서 가장 유명한 변론을 남기기로 했다. 한 가지 소크라테스에 관한 유명한 착각이 있는데 그건 바로 소크라테스의 유언이 ‘악법도 법이다.’라는 것이다. 틀렸다거나 맞았다거나 할 만하지도 않다. 사실 그는 죽기 전까지 쉴 새 없이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죽기 전에 당부하는 말이 유언이라 치면 소크라테스의 유언은 책으로 따지면 몇 장은 거뜬히 나올 것이다. 그래서 악법도 법이다는 말도 소크라테스 사후 문답에서 나오고, 또 신에게 빚을 졌다느니 닭 몇 마리를 신전에 갚으라느니 하는 말도 같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유언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데파이의 사제는 소크라테스가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는 신탁을 내렸다.
이게 내가 아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게 정확할까? 나는,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애초에 소크라테스를 아는 것은 가능할까?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알게 되는 것은 책, 글을 통해서이다. 하지만 애초에 소크라테스는 저작을 남기지 않았다. 심지어 소크라테스는 책을 싫어했다. 그는 글로서는 진정한 지혜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말을 하고 다녔다. 아고라에 나와 입에 불이 나도록 질문을 하고 토론을 했다. 소크라테스는 즉흥곡만으로 무대를 장악하는 인디 음악가 같은 사람이다. 무슨 고집이 있어서인지 기록은 안 하고, 대신 야외 공연을 대차게 다닌다. 실력은 있는지 팬은 많다. 그런데 뭐 글이 있어야 확인을 하지! 그래서 한 소크라테스의 열성팬이 소크라테스네 콘서트마다 따라다니며 곡들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그 팬이 바로 플라톤이다.
소크라테스를 만나기 이전 플라톤은 올림픽 선수 출신에 비극 시도 쓰던, 일명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다. 그는 지적인 젊은이들이 으래 그렇듯 가슴속에 일종의 정의로운 욕구를 품었을 텐데, 어쩌면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보인 소크라테스의 독톡한 행보가 매력으로 다가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졸졸 따라다녔다. 훗날, 소크라테스에 대해 남은 기록이라곤 플라톤의 기록밖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만나기 위해선 플라톤에 의존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플라톤을 믿을 수 있을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아닌 게 아니라 철학자들은 꽤나 한 고집하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꽤나 똑똑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그 철학자 중에서도 철학자인 사람인데, 만약 그가 작정하고 소크라테스를 ‘창작’해 냈다면 어떨까? 자신의 철학을 관철시키기 위해 억울하게 죽은 스승을 창작의 재료로 삼았다면? 마치 이솝이 우화를 지어내듯 가공의 이야기들을 만들에 내어 알리고 다녔던 것이라면? 우리로선 알 방법이 없다! 소크라테스가 진짜 추운 전쟁터 속에서 슬리퍼와 옷 한 벌만 입고 꿋꿋이 버텼을까? 정말 아테네의 그 법정에서 그만큼 의연하고 당찼을까? 정말 그는 죽기 전까지 제자들과 지적인 대화를 멈추지 않다가 죽어갔을까?
물론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실존했다는 것을 믿는다. 왜냐면 플라톤의 기록에 담긴 철학적 함의들은 너무나 가치가 있어 우리는 그의 존재를 존중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기록들을 볼 때, 그 기록의 기록자는 플라톤이니 독자들은 일차적으로 플라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만 플라톤은 겸손하게도 포커스를 소크라테스에게 넘겼다. 그리하여 우리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를 보며 감탄한다. 그쯤 되면 그 서술이 소크라테스에게 왔는지 플라톤에게 왔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 내용들, 지적 기교, 층층이 쌓여가는 논리적 문답만이 중요하다. 만약 그 저자가 플라톤이 아니라 어디 깡촌의 정만복이었고, 진짜 재목은 ‘개똥지빠귀와 땅강아지의 대화’라는 이름이었더라도 내용의 가치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에서는 말이 달라진다. 소크라테스가 실존했다고 치고, 그렇다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100% 확실하게 전달했는가? 만약 플라톤의 자신의 사상을 위해 실재 소크라테스 선생의 말을 살짝 다르게 서술했다면, 우리는 결국 소크라테스의 진의를 왜곡하여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고, 비록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말과 행동을 완전히 베꼈더라도 그가 인간인 이상 소크라테스가 ‘이것은 중요하다’하며 행한 것은 이해하지 못해 적지 않고, 소크라테스가 ‘이것은 중요치 않지’하며 무심코 한 것을 과대 해석해 적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선생의 진의를 100% 확실하게 전달하고 있느냐는 질문은 플라톤이 아닌 독자인 너와 나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다. 생각해보자. 플라톤의 파이돈 같은 경우 고대부터 근대까지 심지어 그 중세까지도 멈추지 않고 온갖 각주가 끊임없이 달려왔다. 그런데 그 각주들을 보면 전부 다 다르다. 아주 다르지 않더라도 하나씩은 논란거리가 있고 또 어떤 건 아예 다르기도 하다. 그런 한편 그 긴 시간을 거치며 그 글귀가 이상하게 변질되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아주 강력한 복병, 고대 그리스어에서 한글로 번역되면서 놓친 언어적 기교는 또 얼마나 될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플라톤의 저작들을 전부 읽은 뒤 타임머신을 타고 플라톤과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고 친다면 플라톤 선생의 시험에 통과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정작 우리는 몇 년간 뺀질나게 본 교과서마저 이해하기 힘든데 말이다.
이런 점이 바로 소크라테스나 고전 지식인들이 대화로 깨우치는 산파식 교육을 선호한 것이다. 글로 하면 그 의미가 온전히 전달되지 않고 또 그마저도 습득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글은 이게 가능하다. 바로 내가 플라톤을 가르치는 일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어디서 굴러먹던 녀석이 플라톤을 가르친다니?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 플라톤이 글을 남겼기 때문에 나는 그 글을 읽고, 그 글에 대한 나만의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비록 오해에서 비롯된 해석일지라도 나를 둘러싼 이 현실의 관점에서 봤을 때 플라톤의 해석보다 나의 해석이 더 적당할 수도 있다. 진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글을 통해서. 애초에 우리는 진짜 플라톤을 온전히 알 수 없으니, 우리가 플라톤을 만들어네는 것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쓰어네듯 우리 또한 플라톤을 쓰어네면 된다. 비록 완전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알 수 있는 최선의 플라톤이며, 사실 어쩌면 우리의 플라톤이 실제 플라톤보다 더 똑똑할 수도 있다.
그래서 철학을 읽을 때 믿음이 일어나면 가라앉히고, 의심이 들면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 너무 믿으면 상상 속의 플라톤에 집중해 자신만의 플라톤을 만들지 못하고, 또 의심이 너무 들면 자신의 플라톤과 실제 플라톤의 괴리가 너무 심해지기 때문이다. 플라톤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을 앉아 보네다가 어느 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플라톤이 가슴에서 살아 움직이는 그 느낌, 바로 그 느낌이 내가 철학을 읽는 이유이고 또 그것이 철학을 읽는 순수한 기쁨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나는 한 번쯤은 살아 움직이는 당신만의 플라톤을 만들어보길 권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