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고민이다. 오늘은 무얼 입을까. 편하지만 후줄근해서 예쁘다 소린 못 듣는 옷, 아니면 불편하지만 빳빳해서 옷태가 사는 옷? 이런 고민에 괜히 뇌만 피곤해지고 출근은 늦어진다. 아예 마크 주커버그처럼 똑같은 옷만 사서 입고 다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도대체 왜, 우리는 옷에 대해 이렇게 예민한 걸까?
애초에 우리는 왜 옷을 입을까. 옷이라는 것은 인간이 털가죽 없이 진화하며 생겨난 산물이다. 아생동물에 가까웠던 인간이 피부를 가리게 된 설에는 4가지가 있다. 추위나 충격으로 보호를 받기 위해 가죽을 몸에 둘렀다는 보호설, 종교적 장식물로 몸을 치장하기 위해 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장식설, 어느 순간 성기나 환부가 부끄럽다 여겨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정숙설, 또 도구를 달아두기 위한 혁대 용으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기능설이다. 네 가지 설이 모두 그럴듯하다. 추위도 피할 겸, 도구나 장신구도 달아둘 겸, 안 입으면 허하니까, 이렇게 각자 설들이 겹쳐서 일어났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이렇게 보는 게 자연스럽다.
인간은 그래서 옷을 입는다. 그런데 그냥 입지 않는다. 인간은 옷을 '잘'입길 바란다. 야생동물들이 서로를 가죽의 윤기와 색으로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듯이 우리 인간들도 옷의 모양에 따라 서로의 상태를 확인한다. 차이점은 야생동물이 주로 보는 것은 서로의 건강상태가 주라면 인간은 옷으로 사회적 상태를 주로 확인한다. 권력을 드러내기 위해 사치스러운 옷을 입으며 번식을 하고픈 인간은 화려한 옷을 입는다. 거친 일을 하는 이들은 편안한 옷을 입고 사회적 일을 하는 사람들은 격식을 차린 옷을 입는다. 따라서 옷을 보면 그 사람이 몸담은 사회와 그 위치를 대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회적 일원으로서 타인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그리고 그로서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우리는 옷을 고르고, 선택한다.
믿음을 주고 싶다면 멀끔한 옷을, 권위를 원한다면 위압적인 옷을, 편하게 다가가고 싶다면 가벼운 옷을, 번식을 원한다면 화려한 옷을 입으면 된다. 시선에서 별 원하는 것 없이 실용적인 옷이 좋다면 편하고 튼튼한 옷을, 지금은 바보 같아 보이지만 나만 좋다면 좀 괴짜 같은 옷도 좋다. 정견, 옷은 사회적 욕구를 볼 수 있는 척도인 것이다. 이러한 욕구를 마음껏 드러 넬 수 있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현대 자유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모두 카멜레온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원하는 모습이 있을 때 원하는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옷을 선택해 입는다는 것은 소수의 고위층에 국한된 행위였다. 심지어 어쩔 때는 고위 계급도 자신의 업무에 따라 입을 수 있는 옷이 정해져 있었다. 생각해보면 치장과 외관을 제어했던 독재 시절이 아직도 백 년도 가지 않았다. 좀 더 가면, 학생의 두발 규제가 풀린 것도 십 년이 넘지 않았다. 특정 사람은 특정 옷을 입어야 한다는 기조는 아직도 짙게 남아 있다. 그리고 그런 기조는 개인에 대한 억압으로서 나타난다. 생각해보면 억압받을 시절엔 적어도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하는 일은 없었으리라. 어린아이면 교복을, 군인은 군복을, 노동자면 업무복을, 지도자면 제복을 입으면 되니까. 사회가 옷을 정해주니까. 구시대적 공동체주의는 잔인하지만 편하다.
따라서 정리. 우리가 아침마다 옷을 고르며 고민하는 이유는 첫째, 사람이 옷을 입기 때문이고둘째, 옷은 한 인간을 보여주는 사회적 지표이기 때문에 주변에 '잘'보이고 싶어서. 셋째, 우리는 원하는 옷을 입을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개인의 미숙함을 추가하겠다. 원하는 것과 그것을 이루는 능력은 별계이기 때문에, 원하는 자신의 사회적 인상이 있지만 그에 맞는 옷을 구하는 능력 역시 별개의 문제이다. 하지만 인류의 미적 관념은 상향평준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잘 보이는 것은 정말 어렵고 적당히 보이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그러니 어느 누가 옷에 대해 머리를 싸매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미숙함도 하나의 계성이다. 의복의 자유는 멋진 옷을 입을 자유이기도 하나 못난 옷을 입을 자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의 계성을 마음껏 뽐 넬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개인이 불쾌할 정도로 옷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겠다. 자신의 미숙함을 마음껏 떨쳐보자.